기 획 특 집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구상 시인 (중)

dariaofs 2016. 12. 17. 04:00

분단과 전쟁… 격변의 시기 겪으며 실존주의 철학 탐구




피란 중 대구에서 문인극을 마친 후 구상 시인(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함께한 문인들. 오상순 시인(가운데 검은색 양복 상의)과 조지훈 시인(앞줄 오른쪽 네 번째)도 함께 했다.구자명씨 제공


■ 격랑의 세월 속에 문학을 통해 신앙의 구현을 모색한 중년기

해방 이후 구상을 기다리고 있는 삶은 모든 기득권을 잃고 맨손으로 출발해야 하는 개척자의 삶이었다.


일제 강점기때 구금되기도 했던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이력이 있어 공산당이 이용하려고 주목하고 있던 그는 원산 지역 문인들과 낸 동인지 「응향(凝香)」에 발표한 시 ‘여명도(黎明圖)’가 문제가 되어 일곱 가지 반동 죄목이 붙여진 필화를 입고 신변이 위급하게 된다.


이에 그는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여 1947년 초 월남을 한다. 이때 그는 고향의 큰집 같았던 수도원과도, 선친 타계 후 홀로 남으신 어머니와도,


머지않아 공산당에 납치되어 순교의 길을 가게 될 형 구대준 신부와도, 신혼의 아내와도 별리되어 ‘꿀꿀이죽처럼 질퍽하고 역한’ 서울 땅에서 ‘관 속에서 깨어나는 나자로의 부활을 그리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김동리, 조연현 등의 남쪽 문인들이 응향사건을 항론하며 거들어 당시 민족진영의 유일한 문학지인 「백민(白民)」에 시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와’를 발표함으로써 서울 문단에 입성하였다.

이후 얼마 안 되어 6·25가 터졌고 구상은 종군기자가 되어 국방부 기관지인 ‘승리일보’를 주재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전후 남한에서 연합통신, 대구매일, 영남일보 등 언론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저널리스트 문사로서 현실 참여적 삶을 십 년 가까이 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여러 형태의 정치적 수난을 겪게 되는데, 1952년 영남일보 주필 직에 있으면서 낸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의 판매금지령,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요청으로 상임고문을 맡았던 대구매일의 피습사건, 재일교포 지인에게 실험용 미제 진공관을 구입해 보낸 일로 용공 이적행위의 모함이 씌워진 레이더 사건 등이 그것이다.

레이더 사건으로 애초에 15년 구형을 받고 저 유명한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달라’는 법정 최후 진술을 한 후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나 문예사상가들의 작품이나 이론을 의식적으로 읽고 공부하였는데,


이때 홀연히 깨쳐 얻은 것이 ‘인간 실존에 내재된 것은 불안이 아니라 수치’라는 명제였다.


나중에 무죄 선고가 내려져 6개월 만에 출옥하여 집필한 희곡 ‘수치’가 3공화국 초기에 드라마센터 공연 개막 직전 공연보류 조치를 당하는 등 그의 필화는 이어진다.

대구 시절 그 언저리는 이렇게 구상에게 있어 시인으로서는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시기였으나 격동의 세월 속에 한국이 배출한 정치·문화·군계의 걸출한 인물들과 교유하고 후대에 이르러서도 거듭 회자되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결국 그의 문학적 삶에 필요불가결한 영향을 미친다.


오상순, 조지훈, 마해송, 최정희, 전숙희, 최태응, 김익진, 이중섭 등 피란 예술인들은 물론 박정희, 이용문 등 군(軍)의 인물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어 ‘군통’으로 불릴만치 전후 대구 사회에서 군부와 문화계의 가교적 역할을 부단히 수행하였다.


그러는 동안 내과의사인 부인 서영옥이 베네딕도 수도원이 월남하여 새로이 정착한 칠곡군 왜관읍에 순심의원이란 병원을 차려 그는 새 보금자리를 갖게 된다.


지금 구상문학관이 서있는 곳이다. 이로써 그에게는 가톨릭 신앙의 본가와 같은 베네딕도 수도원과의 유대가 다시 이어졌고


병원과 살림집이 위치한 낙동강변의 환경은 1970년대 이후 30년 가까이 천착하게 될 필생의 시 작업인 ‘강’ 연작시를 구상하게 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동안 그는 인간세사의 부조리함과 덧없음을 사무치게 느끼면서 다시 형이상학과 신앙의 세계로 내면의 초점을 맞추게 되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심각했던 폐결핵이 두 차례에 걸친 폐수술을 통해 치유되고 난 70년대에 들어 그의 시 세계는 이 내면적 변화와 본격적으로 조응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에게 큰 공명을 일으킨 19세기 영국 시가 한 편 있는데, 프랜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이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 밤이나 낮이나 몇 해를 두고 그로부터 도망쳤다. / 내 마음의 얽히고설킨 미로에서 그를 피하였다.(후략)

신의 목소리가 항상 귓전에서 그야말로 하늘의 사냥개처럼 컹컹 짖어댄다고 느꼈던 구상은 때로 자신이 특별히 저주받은 영혼이 아닐까 하는 지독한 절망에 빠지기도 했으며,


결국 자신의 인생과 문학이 비의(秘義)에나 접하지 않고선 아무런 해결도 못 얻으리란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는 이때부터 키에르케고르, 마르틴 하이데거, 가브리엘 마르셀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탐구하며 자신의 세계관과 시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특히 유신론적 실존주의 사상가인 가브리엘 마르셀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 20세기 현철이 주창한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살기’를 자신의 문학과 인생의 대명제로 삼고 존재의 신비에 대해 깊이 사유한 결과, 구상 대표 시중 하나인 ‘말씀의 실상’이 탄생한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허막(虛漠)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실상(實相)으로 깨닫습니다.

— ‘말씀의 실상’ 전문

구자명(임마쿨라타·소설가)
구자명 작가는 (故) 구상 시인의 딸로, 1957년 경상북도 왜관에서 태어나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뿔」로 등단한 후 꾸준히 창작 활동을 펼쳐온 한국 문단의 중견 작가다. 한국가톨릭문학상과 한국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