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7년 6월 3일 가해 부활 제7주간 토요일(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dariaofs 2017. 6. 3. 07:00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 또는 가롤로 르왕가)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우간다에서는 극히 우호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추장의 도움으로 약간의 진전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는 자기 부족 가운데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뿌리 뽑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 같은 열심한 부하가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추장은 그의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참수하였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다.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추장 몰래 4명의 예비신자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Kizito)도 있었다.

 

추장은 또 다시 박해를 일으켜 모든 신자들을 색출하여 잡아들였다. 체포된 모든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곳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지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등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또 다른 순교자로는 마티아 칼렘바 무룸바(Mattias Kalemba Mur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무룸바(Matthias Murumba)가 있다. 그는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 다른 사람은 키고와의 추장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인데,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개종한 후 주위의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도록 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성 마티아 무룸바를 포함한 총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하게 시복되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영세하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들이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1964년 10월 18일 로마(Roma)에서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아프리카 가톨릭 청소년 활동단체의 수호성인이다.

 

 

                                                                                     (요한 21.20-25)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이제 드디어 부활시기가 끝나는구나. 휴!’하게 됩니다.

오늘로 부활시기가 끝나는데 매일 강론을 올리는 제게는

이 부활시기가 꽤나 길고, 버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사실 부담을 준 것은 주님의 부활이 아니라

부활시기 내내 읽었던 요한복음이었습니다.

그래야지요. 주님의 부활이 부담이 되면 안 되지요.

 
아시다시피 공관복음에는 주님의 말씀과 행적이나 사건이 고루 있지만

요한복음은 거의 모든 분량이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고,

그 내용도 심오하고 중첩과 반복이 계속 되어 매일의 강론이 힘든 거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또 다른 면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비교한다는 점입니다.

누가 더 주님의 사랑을 받았는지,

누가 더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 경쟁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얘기를 여인들로부터 듣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만 무덤으로 달려가는 얘기가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과 루카복음에만 있고 다른 공관복음에는 없으며

루카복음에서도 베드로 사도만 무덤에 간 거로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요한 사도는 여인들의 말을 듣고도 가지 않은 것인데

요한복음에서는 같이 간 것으로 나오고 요한사도가 더 빨리 달려갔지만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는 것은 베드로에게 양보하는 거로 묘사합니다.

 
이 복음의 저자가 요한 사도이기에 이렇게 묘사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오늘 복음의 얘기도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얽혀 있습니다.

 
어제 주님을 따르다 순교하게 될 거라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가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요한 사도는 어찌 될지 묻자

약간은 질책성이 있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시지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혹시 베드로 사도가 자기만 수난을 당하고 경쟁관계인

요한 사도는 수난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 한다는 뉘앙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실제로 이렇게 사랑의 경쟁관계였고,

오늘 주님 말씀도 경쟁하지 말라고 나무라는 말씀이고,

그저 당신을 따르라고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그런 것이기보다는 요한복음의 독자인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지요.

사랑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우리에게, 그래서

쟤는 고통 받지 않는데 나만 고통 받는 것은 아닌지 민감한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 말씀이고 오늘 복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 종종 주님의 사랑과 연결시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나?

사랑하지 않으시기에 고통을 주시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은 사랑하시기에 고통을 안 주시고 나만 주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상관치 말라고 하십니다.

고통을 친구 안젤라와 비교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요셉과 비교하지 말며

안젤라는 안젤라대로 주님을 따르고,

요셉 너는 너대로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수난의 길에는 옆을 볼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고,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옆을 볼 여유도 없다는 말씀이며,

다른 데 힘을 낭비치 말고, 온 힘을 다 쏟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로서 사도행전도 끝이 나는데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은

시편의 노래처럼 다른 곳에 정신 팔지 않고 주님을 충실히 따른 분들입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