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7년 6월 27일 가해 연중 제12주간 화요일(알렉산드레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dariaofs 2017. 6. 27. 06:05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그 도시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조카였다. 성 키릴루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았고, 그의 아저씨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를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갔으며, 그곳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annes Chrisostomus, 9월 13일)를 단죄한 퀘르키아(Quercia) 주교회의에 참석하였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루스가 사망하자 성 키릴루스는 사흘 후에 그의 아저씨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지지자와 그의 라이벌인 티모테우스(Timotheus)의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그는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성 키릴루스는 자신이 축출하였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다시금 재개하였다.

 

그 결과 그가 그 도시에서 몰아냈던 유대인들과 총독 오레스테스는 그의 이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430년 성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지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일 수 없다고 가르쳤으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테오토코스, Theotokos)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 키릴루스는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4월 6일)를 설득하여 430년 8월에 로마(Roma)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같은 해 11월에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주교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단죄하여 교회 일치를 도모하였다.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 교황은 성 키릴루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성 키릴루스는 431년 제3차 에페수스(Ephesus) 공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총대주교 요한과 42명의 추종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 세력을 단죄하여 분쇄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그들 나름대로 회의를 소집하여 성 키릴루스를 축출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성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를 체포하였으나, 교황대사가 와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이 올바르다고 전하자 성 키릴루스는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2년 후 안티오키아 주교들을 대표하는 요한 총대주교와 성 키릴루스는 위의 단죄를 인정하는 동의안을 결의하는데 도달하였고, 네스토리우스는 강제로 유배되었다.

그 후 성 키릴루스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리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하여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신학자이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성서에 관한 그의 주석서 가운데에는 요한, 루카 그리고 모세오경이 있으며, 수많은 교의신학 논문을 비롯하여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에 대한 반박문, 편지 그리고 강론들이 전해온다.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성 키릴루스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은 6월 9일에 기념한다.

 

                                                                (마태 7.6,12-14)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남이 제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오늘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바라기보다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살아온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고 저 자신도 속을 정도로 거짓과 위선입니다.

 
사실 저는 해주기를 바라지 않을 정도로,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바라는 것이 없을 정도로

이미 바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해주셨고, 바라기도 전에 해주셨습니다.

 
아이들이 밥투정을 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이 바라기도 전에 엄마가 밥을 주기 때문인데

실은 아이들이 밥이 필요치 않고 그래서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바라기도 전에 주기에 바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지요.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미리 다 채워주셔서

바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저께 강릉 형제회에 가서 강의를 하였는데

강의가 끝나고 자유롭게 나누기를 하는 중에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살았지만

고통이 사라지고 편안해지니까 오히려 다시 옛날 본성대로

자기중심으로 살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지 않게 되었는데

왜 그리 되었을까 하는 주제로 얘기가 한 동안 오갔습니다.

 
결론 식으로 제가 이렇게 제 생각을 말씀드렸지요.

고통 중에 있을 때는 절실하게 하느님께 매달리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과 힘에 의지해서

그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는 기쁨이 있었는데 편안해지니까

편안함에만 머물며 하느님께 머물지 않게 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덧붙여 얘기하기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쓴 소리를 들으면

당장은 괴롭지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영적으로 애를 쓰지만

듣기 좋은 소리를 들으면 거기에 만족하고 머물기에 영적으로 해롭다고.

 
오늘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정말 없는지 자성하게 된 것이

바로 그저께 한 저의 이 말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진정 쓴 소리를 해주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단 소리를 해주기를 바라는가?

내가 하는 일에 충고를 해주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그저 인정이나 칭찬을 해주기를 바라는가?

 
그리고 주님께서는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주라고 했는데

이제 반대로 나는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고 있는가?

 
내가 바라는 것은 칭찬과 격려와 위로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충고와 비판과 쓴 소리인데

이웃이 바라는 칭찬과 격려와 위로를 충분히 해주고 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충고와 비판과 쓴 소리도 제대로,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 해주고 있는가?

 
이런 면에서 저는 반성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해주는 것이 많기는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들이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해주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해주는 것이지

정말로 그들이 바라고 필요로 하는 해주는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해준다고 해주는 것이 사랑으로 하는 것인지

욕심으로 해주는 것인지 헷갈리는 때가 많은데

오늘도 이것을 성찰하는 하루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