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6,17-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구약성경 에제키엘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곧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고 살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의 악과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에제 3,17-19).”
이 말씀은 예언자의 사명과 책임, 그리고 예언자에 대한 보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언자에게는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꾸짖은 것은,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이라도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에제 33,11).”
그런데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회개하기는커녕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은 실패한 예언자처럼 보입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회개시키지 못하고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충실한 예언자였고, 그런 점에서 성공한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순교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하느님의 계획이었나? 또는 하느님의 섭리였나?”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또는 섭리)’ 라는 말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악한 일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라,
그 악한 일에서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세례자 요한이 살해당한 것은 하느님의 계획도 아니고, 섭리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예언자가 살해당하는 것을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악인들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만일에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회개했다면,
그러면 세례자 요한은 살해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신 대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회개하지 않은 것과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은, 그들 자신들이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한 일이고,
자기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표지다.’ 라고 말하는가?”
이 말은, 결과적으로 볼 때 그렇게 해석된다는 뜻이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처음부터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죽도록 준비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일에나 “이 일은 하느님의 뜻이다.”,
또는 “이 일은 하느님의 섭리다.” 라는 말을 적용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식민 지배와 전쟁 등 우리 민족의 고난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그런 고난을 극복하고 더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많은 고난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그래서 정말로 좋은 나라 건설에 성공하게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전 과정에 대해서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박해자였던 사울이 위대한 사도 바오로가 된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스테파노가 사울의 박해를 받고 죽은 일 자체는 하느님의 뜻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일도 아니고, 섭리도 아닙니다.)
‘인간 구원’이라는 거대한 사업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각 개인의 구원은 각자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과 멸망을 향해서 가는 길.
예언자들은 우리에게 ‘인간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과
생명을 얻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이니 자기 책임이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모든 일을 미리 다 알고 계시지 않은가?
그러니까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뜻대로 되는 것 아닌가?”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시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구원과 생명의 길을 선택하기를 바라십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마음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고,
잘만 하면 그들을 회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일이 잘못되면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앞에도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편안하게 사는 길과
죽을 때 죽더라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고난의 길.
그때 악마의 유혹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유혹했던 악마가 세례자 요한을 그냥 놓아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든 세례자 요한은 편안하게 사는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사실 모든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예언자적 사명이 있습니다(마태 5,13-16).
이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난과 박해를 겪을 수도 있는데,
그게 무서워서 사명 수행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소금’으로 만들어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신풍성당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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