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7년 10월 9일 가해 연중 제27주간 월요일(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 순교자들, 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dariaofs 2017. 10. 9. 05:36

 

 

원래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이탈리아 태생 주교였으나 250년에 선교사로서 프랑스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6명의 주교들이 프랑스로 갔다고 한다. 그는 파리의 초대주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불과 몇 년을 선교하다가 자신의 사제인 성 루스티쿠스(Rusticus)와 부제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와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 세 성인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파리 근교에서 참수되었는데, 참수된 곳을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곧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렀다.

 

 이곳이 오늘날의 몽마르트르 거리이다. 그들의 유해는 센(Seine) 강에 던져졌으나 곧 찾아냈으며, 그들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었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생 드니의 베네딕토 수도원이 되었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데니스(Denis) 또는 드니로도 불린다.

 

 

 

이탈리아의 루카(Lucca) 지방의 디에치모(Diecimo)에서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성 요한 레오나르디(Joannes Leonardi)는 약학을 공부하여 약사로 여러 해 동안 일했다.

 

그 후 콜룸바누스회에 입회했으며, 고해사제이던 도미니코회 파올리노 베르나르디노(Paolino Bernardino)의 지도를 받아 인문학과 철학, 신학을 공부하여 1572년 12월 22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성당에 부임하여 어린이와 성인의 교리교육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병원과 감옥의 사목활동에 정열을 쏟아서 수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자 후원자들과 협력자들이 쇄도하였다.

그때 마침 트렌토(Trento) 공의회가 열리고, 프로테스탄트가 기세당당하게 활동하므로 요한과 그의 후원자들은 새로운 교구 사제회의 구성을 계획하여 프로테스탄트와 대항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1574년 9월 1일 ‘복되신 동정녀의 개혁 사제회’를 결성했다. 이 사제회는 1619년 8월 14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라 개칭되어 승인받았다.

 

이들은 초기에 루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도미니코 회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루카 지방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강력한 반격을 가한 요한의 사도적 열정과 개혁은 교황의 도움으로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1584년 그는 로마(Roma)에 있는 친구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를 방문하여 그의 소개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를 알현하였다. 그와 동료 사제들은 이탈리아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609년 로마(Rome)에 독감이 퍼지자 요한은 독감에 걸린 14명의 동료 수도자들을 간호하던 중에 감염되어 그 해 10월 9일에 사망하였다. 그는 1861년에 시복되었고, 1938년 4월 17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요나 1,1-2,1.11 : 루카10,25-37)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떠나 야포로 내려갔다.”

 
요나서는 여러 번 읽었고 그래서 다른 예언서와 예언자보다 잘 알지만

전에는 놓쳤던 구절이 오늘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전에도 눈으로는 읽었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해 도망갔다는 것은

알고도 있었고 그래서 강의도 했으니 오늘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처음 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새로운 의구심과 관점에서 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다는데 주님을 피해 달아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을 피해 달아날 수 없는데도 우리가 피해 달아나려고 했다면

그것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모르거나 착각을 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주님을 피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일을 피한 것일까요?

아니면 주님도 피하고, 사람도 피하고, 일도 피하고

내 안으로 도망쳐 내 안에 갇힌 것일까요?

 
사실 주님을 피하여 도망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의 종합이기에 먼저

볼 것은 주님을 피하려는 것은 피해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고 싶은 데서 오는 무의식적인 모름이고 착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데 모르는 것으로 해달라는 얘기를 듣곤 합니다.

알아도 관심을 끄라는 얘기이고, 그 문제에 머물거나 개입치 말라는 것이며,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남이 나에게 요구나 부탁을 해오면

어떻게 아는데 모르는 것으로 하냐는 생각도 들고 거부감도 들지만

내가 나에게라면 내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가 나의 이성에 작용하여

하느님을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모르게 하고 착각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숨었지만 하느님은 다 보셨고,

시편 139편이 얘기하듯 어디를 가도 주님 거기에 계시기에

피해 갈 곳 어디도 없음을 우리는 머리로는 알면서도

언 발에 오줌 누듯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그 다음 이 피하고 보려는 심리를 바꿔야 되며

그런 다음 주님을 직면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피해 도망치려는데 실은 주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일을 피하거나 어떤 상황을 피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겠습니다.

 

사실 요나도 주님을 피하여 도망치려 했지만 실은 주님이 아니라

니네베 사람과 맞닥뜨리는 것을 피한 것이고

그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일을 피한 거였지요.

 
우리는 몇 가지 이유로 피하여 도망칩니다.

싫어서 피하는 겨웅,

두려워서 피하는 경우,

귀찮어서 피하는 경우,

부담이 되어 피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이지만

하나로 요약하면 고통이 내게 들어오는 것을 피하는 것이며,

고통이란 악을 경험하는 것이기에 각가지 악을 피하는 겁니다.


사실 싫어하는 것을 피하지 좋아하는 것을 피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그런데 고통과 악을 피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사랑이 없거나 사랑하지 않아서 피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거나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싫고, 다 귀찮고, 다 두렵고, 다 부담이 됩니다.

 
왜냐면 사랑이 없으면 누구나 다 자기중심적이게 되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누리고, 즐기려 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버리고, 피하려 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제도 사제이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도당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귀찮은 일이 되었고,

그 귀찮은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으며 그래서 피해 간 것이지요.

 
하느님을 피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피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직면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