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라는 말씀처럼
일년 중에 성인 중에서도 두번이나 축일을 지내는 성인은 드물 것입니다.
먼저 교회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서 정확히 3개월 뒤인
(엘리사벳이 임신 6개월, 루카 1,35)ㅇㅁ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내고,
두번째로 오늘 수난 기념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기념하는 사순에 해당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들꿀과 메뚜기로 연명하면서 살기도 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세속적으로는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이 세속의 “실패자”를 기념할까요?
그것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기 신념,
이를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그의 소명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 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지혜로 옳은 일과 그른 일을 잘 구별할 수 있었던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날카로운 화살처럼 실천으로 옮깁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
세례자 요한의 소명이었고,
그른 일을 지적하는 것만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도 회개의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바로 마르코 복음서의 시작에서 이야기 하는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광야의 외침인 것이다.
광야에서의 외침이 공허한 소리의 울림으로 끝나지 않고
말씀을 통해서 2천년간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을 때,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세례자 요한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요한을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만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 대신에
헤로데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
그밖에 경비병과 요한의 제자들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즉, 요한의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야기의 중심이 됩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요한인 것임은 분명합니다.
요한이 전면에 들어나지 않았는데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요한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살아온 이의 발자취가 큰 여운을 남기기에
우리에게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던질 수 있도록 문학적 장치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요한이 이렇게 살아야해, 저렇게 살아야해!라고 직접 언급하는 것보다
그의 삶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고 어떠한 결과를 내었는지를 우리가 안다면
요한이 살아온 삶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보다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자명하기에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에 집중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박동현 제노 신부 (대전교구 목동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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