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9일
우리가 지난주 월요일부터 읽고 있는
요한묵시록은 성서 안에서도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첫째로, 묵시록은 우리가 살면서 듣어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보지 못했던 여러가지 미스테리한 동물의 형상과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묵시록은 환시로 경험한 것을 표현한 것이지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묵시록을 해석한다는 것은 곧
묵시록을 잘못해석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성서신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시록은 하느님의 비밀을 즉 베일에 싸여 있는 비밀을 벗겨주고 있습니다.
한자어로 묵시록은 “말없는 가운데 비밀을 나타내 보인다”라는 뜻이고,
그리스말로는 Apocalutein,
즉 하느님의 비밀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비를 해석하거나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이미지, 은유, 상징들을 통해 신비를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가만보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하느님의 신비가 가득차 있지만,
우리에게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신비를 그저 지나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비는 우리에게 이미 열려 있지만,
우리는 그 신비를 다 파악하지 못합니다.
마치 맑고 투명하고 깊고 깊은 호수를 마음에 떠올려 봅시다.
저의 0.3의 시력을 가졌고,
안경을 쓰고도 1.2 정도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 깊은 호수의 내려다보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애쓰며 쳐다보지만,
호수가 하도 깊어서 그 바닦까지 제 시력이 닿지 못합니다.
이렇게 신비는 우리에게 열려 있으나,
나의 한계로 그것을 다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나에게 주어지는 계시를 통해서만
그 신비의 실루엣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계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서와 자연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서를 통한 믿음으로만 신비가 계시되고
간혹 신비가들에게는 환시로 계시가 주어집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비의 모든 부분을 알 수는 없습니다.
사실 신비를 체험한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엄청난 체험을 통해 압도되어
두려움(경외심)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치
히말라야 정상에 서서 대자연이 우리를 압도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듯
신비를 경험한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세상의 끝나는 날에 대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올 때”
우리에게 드러나는 신비에 대하여 두려움에 까무러칠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어둠의 자녀들은 종말을 삶의 종착지로 여기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드디어 우리가 꿈꾸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고대하고 있던 하늘나라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종말을 두려워 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
즉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묵시록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박동현 제노 신부(대전교구 목동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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