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당신이 사시는 고을에서 중풍병자 일행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태 9,2) 어제, 그제에 이어 또 "믿음"의 이슈가 등장합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저마다 부족한 우리에게 그만큼 소중한 덕목이기 때문일 겁니다.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굳이 시간과 공을 들여 괜한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움직임과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이와 동행하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의 믿음을 알아보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위로와 희망을 주는 참으로 다정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첫 말씀에 먼저 반응한 건 환자가 아니라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죄의 용서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유보된 권능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신성 모독으로 들렸을 겁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첫 말씀이 영의 원리에 기인하는 표현이었다면, 이 두번째 말씀은 땅의 원리를 충족시키는 표현입니다. 매우 구체적이면서 실천적인 지시여서 달리 오해할 소지가 없이 명확합니다.
그리고 즉시 이루어집니다. 이 말씀의 실현에 대해 복음사가는 "그러자 그가 일어나 집으로 갔다."(마태 9,7)고 전합니다.
고통을 겪는 환자 앞에서 예수님은 구구절절 율법 학자들과 입씨름하느라, 또 당신을 변호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즉시 인간의 사고방식에 가장 익숙하고 무리없는 표현으로 바꾸어 말씀해 주시지요. 어떻게 표현되었든 의미는 같습니다.
곧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마태 9,6)을 일깨워주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현된다는 걸 증명하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사악의 번제라는 창세기의 유명한 대목입니다. 귀하게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데리고 지정해 주신 장소로 향합니다.
성경 저자는 아브라함의 움직임만을 서술할 뿐 그의 내면에 오가는 짐작 가능한 감정적 동요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어, 독자인 우리로서는 각자 자기 삶을 투사해 이를 추측하고 읽어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창세 22,6)
교부들은 자기를 태울 장작을 진 이사악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행하는 아브라함을 인류 구원을 위해 성자의 죽음을 허용하신 성부 하느님으로 보지요.
그런데 오늘 제게는 하느님께 순종해 길을 나선 아브라함이 단순히 성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성부인 동시에 성자라고 느껴지네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의 끝을 아시면서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에 스스로를 내어놓으신 것처럼,
아브라함도 자기의 생명이고 분신이고 미래인, 또다른 자기라 할 수 있는 독자 이사악과 함께 아버지로서의 죽음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가는 중이니까요.
아브라함이 손에 쥔 "불과 칼"이 다가옵니다. 사람을 해칠 수도 있고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는 참 강렬한 도구들이지요. 그래서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고(탈출 3,2; 13,21; 19,18 외 다수 참조), 날카로운 칼은 "말씀"으로 연결됩니다.(히브 4,12 참조)
또 이 "불과 칼"은 창세기 원조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4)
여기서 "불칼"은 영원한 생명과 인간 사이의 철저한 단절을 유지시키는 방벽이고 근접할 수 없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브라함이 순명으로 이사악의 생명뿐 아니라 후손 대대로 민족의 생명을 보장받았듯이, 성자 예수님께서도 순명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불칼"이 거두어지게 하실 겁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칼과 불"이 숫양의 번제에 사용된 것처럼, 하느님 나라와 인간 사이를 가로막았던 "불칼"은 하느님 현존이 되고, 말씀이 되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뜨거운 사랑이 되어(아가 8,6-7 참조) 오히려 인간을 되살리고 행복하게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태 9,6)
예수님의 권한은 바로, 사랑의 자발적 순명에서, 사랑 때문에 떠안은 죽음에서, 인간을 위해 자신을 잊은 온전한 소멸에서 옵니다. 누구도 자기를 잊은 숭고한 죽음 앞에서 "네가 무슨 권리로..."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께서 친히 죽음으로써 인간이 진 죄의 짐을 벗겨 주셨으니 우리로서는 감사하며 따를 뿐입니다.
삶의 질곡을 통과하는 동안 죄와 약함으로 인해 마비되고 굳어지고 쓸모없이 늘어져버린 우리 영혼 구석구석에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속삭이시는 그분 음성에 즉시 일어나 따릅시다. 예수님 권한은 유통기간이 없습니다.
소멸시효도 없습니다. 불칼이 치워진 영원한 생명나무에 다다를 때까지 쭈욱 이어질 그분 권한에 기대어 부족한 나를 잊고 그저 믿으면서 묵묵히 나아갑시다. 마치 오늘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이들처럼 말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강 론 말 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9.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0) | 2019.07.06 |
|---|---|
| 2019.07.05. 한국교회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기념일 (0) | 2019.07.05 |
| 2019.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0) | 2019.07.03 |
| 2019.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0) | 2019.07.02 |
| 2019.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0) | 2019.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