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복음에서는 단식 논쟁이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라면 기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 부류보다는 새로운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비교적 열려 있을 것 같았는데,
율법이 요구하는 전통 중 하나인 단식 여부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바리사이들과 동류로 묶어 이야기하니 좀 의아스럽고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전통을 넘어서 새 질서가 자리잡히기까지는 수많은 층위의 미세한 도전과 수용, 변화들이 쌓이고 또 쌓여야 하는가 봅니다.
이에 예수님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제자들을 "혼인 잔치 손님들"(마태 9,15)로 비유하시며 하느님 현존의 기쁨을 누리는 그 자체가 더욱 하느님께 영광과 위로를 드리는 것이라고 이르십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과 "스승님의 제자들"처럼, 오늘 복음 대목에는 서로 병립이 불가능한 개념들이 나오는데, "새 천 조각"과 "헌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헌 가죽 부대" 등이 그러한 표현입니다.
이들은 각기 따로 있을 때는 제법 각자의 목적에 따라 소용이 있지만 섞일 경우 둘 다 못 쓰게 되어 버리는 조합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가장 적합할지 알아 제 짝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 온전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
예수님은 모두가 제 가치를 충만히 하기를, 그리하여 모두가 충족되기를 원하십니다.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열리는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질서를 포용하여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우주 사이에 관계성을 정립합니다.
옛 질서는 새로운 가치를 담기에 낡았고 고착되어 버렸으며 유연성을 잃었으니까요. 예수님께는 모두 소중합니다. 모두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제1독서는 야곱이 에사우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입니다. 오늘 내용은 앞의 부분 중, "에사우는 솜씨 좋은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다.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우를 사랑하였고 레베카는 야곱을 사랑하였다."(창세 25,27-28)는 정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두 아들에게 나누어 쏟아진 부모의 편애가 이런 사기극(?)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요.
얼핏 모든 복을 가로챈 야곱이 승자로 보이지만, 형 에사우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은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 머물러 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이 결핍된 것은 작지 않은 상처로 각인됩니다.
에사우를 부르는 "내 아들"이라는 단어가 이사악의 입에서 무려 일곱 차례나 반복되어 나오는데, 그 "내 아들"이 아니면서 내 것 아닌 그 다정한 호명을 듣고 있는 야곱에게 짠한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창세 27,29)
요즘 상속법에는 자녀들에게 동등한 상속 자격이 주어진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뀐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요. 특히 고대에는 장자들에게 유산과 더불어 힘과 권리, 축복까지 대부분이 상속되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거슬러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면 형제간에도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이 형성되고 한 어머니의 자식들 사이에서조차도 굴복과 종속의 사슬이 형성됩니다. 축복의 유무가 이를 가릅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창세 27,29)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축복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얼핏 들으면 하나 이상할 것 없는 내용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곧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그분이 오기 전까지만 통용되는 축복입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예수님은 모두를 살리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모두에게 각자에게 맞는 풍요를 충만히 채워주고 싶어하십니다.
불균형한 애정과 편향된 축복으로 기울어진 형제간의 지위와 신뢰를 당연시했던 시대의 손상되고 훼손된 온전성을 사랑으로 회복시키려 하십니다.
잠시 사족을 덧붙이자면, 분명 말씀은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창세 25,23)고 했고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창세 27,29)리라 하였는데요.
먼 훗날 야곱의 귀환 장면에서 줄곧 자신을 "종"이라 일컫는 이는 에사우가 아니라 야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당한 사람이 아니라 가로챈 사람이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양심의 법이니까요.
게다가 더욱 반가운 것은 "들이닥쳐서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두려워"(창세 32,12) 선물 공세를 퍼붓는 야곱에게 "내 아우야 나에게도 많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창세 33,9) 하는 호인 에사우의 반응입니다.
육신의 아비가 줄 수 있는 축복은 한 사람에게 쏟아내고 나서 바닥을 드러낼지 몰라도, 아버지 하느님은 에사우에게서 당신 축복을 거두시지 않으셨다는 반증이 되어 기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어쩌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 율법 내용을 완전히 부정하고 판을 뒤엎는 그런 새로움이 아닐 겁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움이란 하느님의 율법에 앞서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드리는 새로움입니다.
승자독식의 논리 아래 하나를 죽임으로써 하나를 살리려다 둘 다 죽이고 못쓰게 만드는 오늘날의 새태에 둘 다 살리는 묘수를 가르쳐주시고,
두루두루 당신의 창조물 모두를 사랑하고 돌보시고 축복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입니다. 모두들 살리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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