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믿음"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나온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은 온 존재의 바람이 실린 절규에 가까운 고백이고, 하느님은 결코 이를 값어치 없다고 여기시지 않습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 9,18)
회당장의 믿음입니다. 자식을 보내고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의 순간이지요. 그런데 그는 분명히 딸이 죽었다고 해놓고서는 "그러나"라는 말 뒤에 영 엉뚱한 말을 합니다.
어떻게 해 주시면 살아나리라는 방법까지 제시하면서요. 회당장의 이 말은 예수님께 청을 드렸다기보다 본인이 믿는 바를 고백하고 선포한 것에 가깝습니다.
"물러들 가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태 9,24)
선선히 그를 따라나서신 예수님께서 장례가 한창인 집에 들어서시며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믿음을 고백한 회당장의 그 "믿음"을 믿어주신 겁니다. 그의 인간됨이나 직업, 신분이 아니라 그 단순하고 굳건한 믿음만을 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비웃은 이들(마태 9,24 참조)은 이 놀랍고 신비로운 현장에서 순식간에 열외자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함께 믿음을 고백했거나, 적어도 그 믿음을 기대하기만 했어도 뒤이어 일어날 기적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을텐데 참 아쉽습니다.
복음에는 또 다른 축의 믿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해 온 여인의 믿음입니다. "내가 저분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 9,21)
피 흘리는 것을 정결하지 못한 상태로 여기는 고대 관습과 율법의 그늘에서 그녀는 무려 열두 해를 가족과 이웃, 집회와 축제에서 소외되어 살아왔을 것입니다.
율법이나 타인뿐 아니라 스스로도 자신을 더럽고 부정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요. 게다가 잘 알다시피 열둘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이므로 그녀에게 고통의 시간은 영원히 정지된 듯한 죽음과도 같았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손을 내뻗는 그녀를 관상합니다. 현실에서 부정한 상태인 그녀는 누구도 만지면 안되지만, 믿음이 이 모험을 감행하게 부추깁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지막 시도일지라도, 또 아직 사랑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상대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은 결국 사랑으로 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충직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니까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열두 해를 그림자처럼 지내온 그녀를 "딸"이라 다정히 부르시는 예수님의 따사로운 눈길을 바라봅니다.
그녀에게 당장 필요한 치유는 그 자체로 그녀에게 구원이 될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공동체 삶에 녹아들 자격을 얻은 그녀가 그 구원을 누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다름아닌 "용기"가 될 것입니다.
제1독서인 창세기 대목은 에사우의 복을 가로채고 도주 중인 야곱의 꿈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하느님의 통큰 믿음입니다. 누구보다 야곱의 됨됨이를 잘 아시는 분이 형을 속이고 도망 중인 그에게 조건 없이 복을 내리십니다.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신 분이 이 약속을 다 이루어 주실 때까지 함께하신다니, 이 말씀은 곧 영원과 이어져 있습니다. 외롭고 두려운 '홀로' 광야길, 미래를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함께함"의 약속은 생명수나 다름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신비로운 꿈과 하느님 현현, 그리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대한 야곱의 응답이 너무 초라하게 들립니다. 조건 없는 하느님의 믿음에 대해 야곱은 조건부 마음으로 응하고 있으니까요.
"...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창세 28,22)
간단히 말하자면, '보호와 양식과 의복이 보장되고 무사귀환까지 이루어지면 그때에 '비로소' 제가 당신을 제 하느님으로 모실 것이고, 여기가 '진짜로'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야곱의 계산적이고 거래에 가까운 기도, 이게 바로 인간의 기도 수준일 수 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슬퍼집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신뢰를 절반이라도, 아니 억만분의 일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그분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요!
그런데 야곱의 기도를 꼭 부정적으로만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이제 막 시작이니까요. 조건부 신앙은 자기에게 조건 없이 쏟아붓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조건을 내려놓게 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될 때까지 주님께서 믿어 주시고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이루어질 때까지 믿으면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믿음은 모험입니다. 보이는 것, 증명된 것은 앎의 영역이지 믿음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면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 결과를 선명히 알게 됩니다.
믿는 바가 곧 결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오늘 야곱의 조건부 기도만큼도 못 되는 우리의 얄팍하고 부서지기 쉬운 믿음부터 손 보아 주십사고 청합시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약속이 되어가는 동안 믿음도 함께 커갈 테니까요. 우리는 그저 될 때까지 믿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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