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dariaofs 2019. 7. 10. 05:56



오늘 미사의 말씀은 "열둘"이란 숫자를 내외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에 협력할 열두 제자를 뽑으셨고, 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를 대표할 열두 아들이 등장하고요.


 (막내 벤야민은 가나안 땅 아버지 야곱 곁에 남아 있어 이름만 거론됩니다만 요셉과의 끈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이 부여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 이미 산상설교를 기점으로 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접해 가르침을 듣고 있던 터라 "이제야 열두 제자를 뽑으셨나?" 하며 이 시점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보다 깊고 친밀한 관계로 당신과 엮일 정예부대를 "가까이 부르신" 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가련한 군중의 현실을 목도하신 후,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하고 명하신 직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더러운 영, 질병, 허약함을 치유할 "권한"(마태 10,1)을 열두 제자에게 첫 선물로 주십니다.


이렇게 "권한"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 무슨 대단한 자격이나 권력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돕고 섬기는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힘입니다.


이 능력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을 위해 쓰기로 되어 있는 선물이지요.

이어서 그 권한을 받은 열두 제자의 이름이 길게 나열됩니다. 이처럼 경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실제로 그 당시 그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진실성에 보증이 될 뿐만 아니라 해당 인물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열둘"이란 숫자는 야곱(이스라엘)이라는 한 아비의 피를 나누어 받은 열두 아들과, 그들을 수장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부르셔서 묶어 주신 열두 사도는 혈연으로 엮인 구약의 백성을 초월하는 하느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모든 인종, 언어, 혈연, 지연, 종교, 신분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완전한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지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


사실 이방인 지역도 사마리아 고을도 가지 말고 그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칫 인종차별주의나 민족우월주의, 선민사상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말씀으로 곡해될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편파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복음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그 답이 헤아려집니다. 지금의 열두 사도는, 그들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만, 그 자리로 불리워 권한을 받은지 고작 몇 시간도 채 안된, 말하자면 "초짜, 애송이" 단계일 뿐입니다.


그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본 것은 있을지 몰라도 각자 흩어져 그 엄청난 권한을 흉내도 아니고 실제로 수행하기엔 미숙함이 없지 않을 시기일 겁니다.


그야말로 첫 파견이니까요. 갓 사제서품을 받고 파견된 보좌신부나 갓 종신서원을 한 수도자라고나 할까요!

이방인 지역이나 사마리아 고을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될 때, 부족한 믿음에 균열을 일으킬 무수한 요소들이 잠재된 곳이지요.


열두 사도는 먼저 종교와 관습이 익숙한 이스라엘 동포들 안에서 길 잃은 양들을 찾아나서는 첫 걸음을 떼면서, 이제부터 차근차근 하느님의 일을 실전으로 배워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예수님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을 통해 "때"가 되면, 어느새 굳건해진 영혼과 정신, 믿음을 지니고 이방인 지역과 사마리아 고을은 물론 온 세상으로 파견되어 선하고 호의 가득한 "권한"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채 준비가 되지 않은 미숙한 상태에서 "권한"은 자칫 오용될 염려가 큽니다.


또 감당하기 벅찬 상황 안에서 이 권한을 섣부르게 사용하게 되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도들을 그저 주술사나 치유사 정도로 그치게 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권한이 기술로 전락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죠.

제1독서는 형들의 질투로 팔려가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재상이 된 요셉과, 굶주림을 모면하려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의 해후 대목입니다.

"죗값"(창세 42,21).
"피에 대한 책임"(창세 42,22).


형들을 알아본 요셉이 부러 을러대는 으름장에 형들은 영문도 모르고 두려움에 떨다가 이 두 단어를 스스로 꺼내어 듭니다.


느닷없이 당하는 오해와 종용 앞에서 스스로 자기들의 죄를 소환한 것이죠. 이는 어쩌면, 죄악은 당한 이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가해자에게도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남에게 해를 입힌 자는 삶의 구비구비마다 부딪히게 되어 있는 크고 작은 고통 앞에서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범죄 현장으로 돌아가 그 언저리를 맴돌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 자신도 죄악의 피해자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의 첫 파견 때 주신 권한이 바로 이 죄악의 고리를 끊어 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병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시 사고방식 안에서)


더러운 영과 영육의 질병과 허약함은 부지불식간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죄악의 상처에 그 뿌리를 두고, 죄책감과 자기혐오와 절망에서 영양분을 받아 성장하니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권한을 허락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분께서 인류의 "죗값"을 치르러 오셨고 "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져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해 책임을 지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꺽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화답송)


어떤 구실로도 요셉의 형들이 저지른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요.


다만 하느님께서 그런 험한 꼴을 당한 요셉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민족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성장시켜 주셨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얕은 계략과 검은 술수보다 크신 하느님의 계획을 느낍니다.

이처럼 악과 결탁한 세상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있었어도, 결국 이 죽음을 통해 온 인류의 죗값을 치르고 속량하여 구원을 이끌어 내신 하느님 계획 앞에서는 무력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권한을 받은 이의 자격과 상관 없이 권한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권한이 권한을 부여한 이의 피의 값이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 고쳐 주고 싸매 주고 일으키고 온전함을 되돌려 주는 일은 이 권한을 행사하는 제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보잘것 없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제자들인 벗님을 통해서 오늘도 일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 감사!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