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말씀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앞부분은 예수님의 구마 기적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고, 뒷부분은 예수님의 선교 여행입니다.
마귀 들려 말못하는 이를 치유해 주시자 사람들의 평판이 갈라집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마태 9,33)고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예수님의 행적이 못마땅한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쫒아낸다"(마태 9,34)고 비난을 하지요.
선을 있는 그대로 선이라 받아들이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재창조의 신비 앞에 경탄하고 찬미하며 하느님의 경이로움에 감사를 올리게 되니 그렇습니다.
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선에 대해서 악이라 왜곡하여 규정하는 이들은 행복과 점점 멀어집니다. 두려움을 야기하고 혐오스러우며 매사에 찝찝한 상태로 남는 악에 기대어 선을 평가하기에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진 탓입니다.
군중의 경탄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또 바리사이들의 곡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시는지 복음사가는 침묵합니다.
진리를 행하는 이는 주변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까요. 호평도 악평도 그분의 태도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분은 진리와 선으로 아버지의 뜻을 묵묵히 행하실 뿐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예수님은 귀로 들려오는 평가에는 잠잠하셨지만 이처럼 군중을 만나서 직접 보신 현장에서는 마음이 출렁이십니다.
"가엾은 마음!" 권능과 위엄과 영광의 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민과 공감의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실존입니다.
홀로 청정하고 충만한 하늘 위 옥좌를 박차고 내려와 바람 잘 날 없다는 가지 많은 나무가 되신 분은, 자녀들을 흔드는 작은 바람에도 가슴을 앓으시며 애태우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예수님은 양들이 불행한 원인이 "목자의 부재"라고 진단하시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진실되고 선하게 돌볼 목자가 필요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분은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 마음에 착한 목자이 되고자 하는 결심이 세워지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평판에 좌우되지 않고 다만 양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헌신할 착한 목자말입니다.
양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시달리며 기가 꺾인 하느님 백성입니다. 그
들이 착한 목자의 손길로 생명을 얻고 풍요로워지고 각자의 생명력을 충만히 살기 바라십니다. 예수님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제1독서는 그 유명한 야곱의 야뽁강 씨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창세 32,25)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야곱이 온 가족을 먼저 건네 보내고 뒤에 혼자 남습니다. 세상에는 공동체적으로 함께 할 일도 있고, 홀로 직면해야 하는 일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 앞에서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순간이 소중한 만큼, 각자 하느님과 홀로 대면해 씨름을 하는 순간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필요하지요.
"저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야곱의 집념이 느껴집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 혹독한 세월을 지낸 그가 이제 형을 대면해야 하는 순간에 앞서 자기와 가족의 목숨을 보장받으려고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지금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니까요. 결국 엉덩이뼈를 다쳐가며 목숨을 걸고 매달린 끝에 야곱은 축복을 받고(창세 32,30) "이스라엘"이 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어쩌면 세상과 인류에게 복을 얻어 주기 위해 당신 목숨까지 바치신 우리의 예수님이, 자기와 가족의 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매달린 야곱의 치열한 기도를 확장해 완성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과 뒤엉켜 밀고 당기는 야뽁 건널목의 씨름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느님과 홀로 대면해 바치신, 외롭고 뜨겁고 피땀 어린 절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그리고 야곱이 다친 엉덩이뼈는 예수님께서 바치신 목숨으로 연결되어 세대가 바뀌어도 퇴색될 수 없는 사랑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살다 보면 우리 각자 하느님 앞에 서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대신할 수 없고, 대충 묻어갈 수 없는 결정적 때(카이로스)입니다.
목숨을 걸고, 때론 목숨보다 소중해 보이는 각자의 "무엇"을 걸고 끝까지 매달려 복을 얻어내려는 집념이 과연 스스로에게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가 아니라 그분 바로 곁자리를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거룩한 집념과 갈망으로 주님과의 한 판 승부에 나서려면, 믿음과 열정, 사랑의 근육을 키우고 다듬는 준비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말씀과 성체는 이 한 판 승부를 위해 영혼의 체력을 단련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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