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충격을 덜어주고 싶으셨는지 반복된 질문으로 본론에 접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루카 9,18).
스승과 제자들이 중요한 순간을 침묵으로 준비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요. 제자들이 분명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셨다고 하네요.
모두 함께 기도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건데, 그러면 기도하는 스승 곁에서 제자들이 무얼 하며 "함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스승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이후에 나오는 걸 보면(루카 11,1-13 참조) 아직 그들은 준비가 덜 되었던 것일 수도 있지요.
그래도, 설령 적극적으로 함께 기도하지 않았더라도 기도하는 스승의 침묵에 함께하며 그간 스승님이 보여 주신 기적들과 그분에 대한 칭송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루카 9,10-17) 바로 다음에 오늘의 대목이 나오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18)
먼저 예수님은 군중의 생각과 반응을 물으십니다. 불현듯 나타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는 존재에 대해 형성된 보편적 인식에서 출발하시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 나라 도래를 알린 세례자 요한(마태 3,1-2 참조)이나, 빵을 많게 하고 죽은 이를 살린 엘리야 예언자(1열왕 17,8-8-24),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박해받고 죽은 옛 예언자 중 하나로 받아들입니다.
꼭 맞는 정답은 아니나 그렇다고 틀린 답도 아니지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이제 예수님의 질문이 한 걸음 더 들어가십니다. "나와 함께 지내는 너희는 (그런 보편적 인식을 바탕으로 깔고) 나를 누구라고 하겠느냐?" 물으시는 겁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이렇듯 교의적이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론을 토대로, 각자 맺은 인격적, 주관적, 실존적 관계성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베드로의 입에서 메시아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안드레아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뒤 형 시몬(베드로)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어쩌면 이미 제자들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심을 (아직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겁니다.
메시아가 아니시라면 민족적 열망이 좌절될 뿐 아니라, 모든 걸 버리고 따른 자기들의 삶도 무의미해질 테니 꼭 그래야 했겠지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루카와 달리 베드로의 고백이 살과 피에서 나온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기술했지요(마태 16,13-20 참조).
과연 오늘 제1독서에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하까 2,5) 것이라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제자들이 (우리는) 드디어 정수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예언서 갈피마다 등장하는 메시아의 모습이고 모든 참 예언자가 받아들인 운명이었건만, 제자들도 우리도 그다지 직면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속적 힘과 영광으로 덧칠된 구원자의 모습을 고대하는 사이 잃어버린 진리기도 할 겁니다.
제1독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워로와 격려, 축복이 쏟아집니다.
"용기를 내어라"(하까 2,4).
"두려워하지 마라"(하까 2,5).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하까 2,9).
공사가 진행되기 어려운 현실에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려주신 이 말씀들은 유배의 상흔을 지닌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군만마보다 큰 힘이 되었을 겁니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하까 2,9).
유다 역사의 황금기인 솔로몬 임금 시절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의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될 약속이지요.
그런데 이 약속이 새 성전 완공이라는 가까운 미래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신비이고 깊이이며 영원성입니다.
수 세기가 지난 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 한가운데로 육화하시어 성전이신 당신의 현존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시고요.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예고에는 수난,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도 포커스가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과 배척과 죽음을 거쳐 재건된 성전의 영광은 옛 것에 비길 바 없이 온전하고 아름다울 테니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성령의 성전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물리적 장소와 건물을 초월하는 성전이 끊임없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잘것없는 죄인에 불과하고 부족함 넘치는 우리 (성전)의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는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보다 우리를 더 크게 고무시키는 약속이 될 겁니다.
이제 눈을 돌려 천상 예루살렘을 바라봅니다. 지상 순례를 거쳐 그리운 주님과의 해후와 사랑의 심판을 지나 찬란히 빛나는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더이상 성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용기를 냅시다. 성전을 지을 "은도 주님의 것, 금도 주님의 것"(하까 2,8 참조)입니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따르기로 작정하고 나선 주님의 길, 예언자의 길 안에 머물러 걷고 기도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성전이신 분이 성전인 우리를 성전이 필요없는 곳으로 친히 데려가실 것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강 론 말 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9.09.29. 연중 제26주일 - 오상선 신부 (0) | 2019.09.29 |
|---|---|
| 2019.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0) | 2019.09.28 |
| 2019.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0) | 2019.09.26 |
| 2019.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0) | 2019.09.25 |
| 2019.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0) | 2019.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