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dariaofs 2019. 9. 28. 04:01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루카 9,43).


오늘의 복음 대목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악령 들렸던 아이의 치유 사화에 이어 나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놀라워한다는 말이 이해되지요. 복음사가는 "다", "모든"이라는 수식어로 군중이 느끼는 경탄과 경외심을 극대화해 전달합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갑자기 찬물이 확 끼얹어진 듯합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제자들을 향해 이르십니다.


 "너희는"에 사용된 조사 "는"은 군중과 제자들을 구분합니다. 설령 군중은 경탄하고 기대에 부풀지라도, "너희에게만는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 친히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시며 첫 번째 예고 때(루카 9,22 참조)와 달리 수난에 대해서만 간략히 전하십니다. 기적도 일으키고 사람도 되살리는 분이 "사람들 손에 넘겨진다"니...


이 표현은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중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깍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이사 53,7) 백성의 악행을 자원하여 대속하는 메시아 상이 깔려 더 비장하게 들립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루카 9,45).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잔뜩 고조된 성공 체험, 흥행 분위기에 들떠 있으니 수난 예고가 귀에 들릴 턱이 없지요. 이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빈틈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미사의 독서(입당송, 제1,2독서, 화답송, 복음 환호송, 복음, 영성체송)에는 우리 각자를 만나려 다가오시는 말씀께서 현존하십니다. 각자에게 맞게 다가오시는 말씀은 우리의 역사, 실존, 상황, 특성을 건드리시며 말을 건네시지요.

이런 비유는 좀 경박스러울지 모르나,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은 진정 살아계시기에, 우리 각자에게 맟춤형으로 요리된 "당신을 위한 오늘의 특선 메뉴"와 같습니다.


성령의 현존을 청한 후 그 말씀들을 읽고 머물고 묵상하면서, 천사와 목숨을 걸고 씨름한 야뽁 나루터의 야곱처럼 엎치락뒤치락 매달려, 들고 파고, 물어뜯고, 잘근잘근 씹고, 삼키고, 되새기고 하다 보면 말씀에 감추어진 뜻은 서서히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물론 이 과정이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매우 적절한 때에 은총으로 건드려 주시기에 깨달음 또한 그분께 맡기고 묵묵히 머무를 뿐이지요.


이는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준다"(지혜 6,13)는 지혜서 저자의 경험적 명제로도 확인되는 여정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이제보니 제자들이 못 알아들은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였지만, 더 깊이 진지하고 대담하게 여쭙지 못한 그들의 태도도 일조를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미 자기 안에 답을 가지고 있을 때는 더 못 알아듣습니다. 아니, 자기 욕구와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면 알아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못 알아듣는 체하는 동안 불편하게 다가오신 말씀께서 이번에는 그냥 지나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주님께서 "당신을 위한 오늘의 특선 요리"를 준비해 다가오시는데, 짐짓 모른 체하며 마치 뷔페에 온듯 구미에 맞는 음식(말씀)을 고르려 합니다.


소화가 잘 될 것 같은 음식, 즉 양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큰 무리 없이 무탈하고 다복하게 사는 데 격려와 위안이 되는 말씀을 찾아 헤매기도 하지요.

말씀에 관해 묻기 두려워하는 태도에는 여러 원인이 작용할 겁니다.


우선 게으르고 귀찮아서, 말씀보다 중요한 다른 일들이 널려 있어서, 말씀이 꽁꽁 감추어둔 자아를 건드릴까봐, 말씀이 미지근한 나를 삼켜버릴까봐, 행여 십자가를 주면서 세속적 욕망을 놓으라고 할까봐...

제1독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 시기에 하까이 예언자에 이어 활동했던 즈카르야 예언자의 환시와 신탁 부분으로 그에게 내린 여덟 개의 환시 중 세 번째 환시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즈카 2,6).


즈카르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펼쳐 주시는 환시의 뜻을 묻습니다. 환시에 담긴 모호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한 인간이 천상 존재에게 용기내어 묻는 것입니다.


그에게 보여진 여덟 개의 환시 중, 드러난 정황이 매우 명확한 네 번째 환시(즈카 3,1-10)와 천사가 그에게 질문한 여섯 번째 환시(즈카 5,1-4)를 제외하고 즈카르야는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그에게 질문을 막을 만큼 심각한 선입견이나 두려움이 없고 또 심저에 자기를 위해 고정된 답이 없기에 가능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를 잡으리라. ...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즈카 2,8).


새 성전 건립과 도성 성벽의 재건에는 이방인의 시기와 방해라는 외부적 요인도 있었지만, 내부적 분열 상황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극복해야 할 어려움 중 하나였지요.


이에 주님께서 이 도성 재건이 당신의 뜻임을 반복적으로 예언자를 통해 들려 주십니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5).


이제 새 예루살렘은 자기 민족만의 좁고 편협한 울타리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 구분과 분리, 차별을 상징하는 성벽 없이, 들어오려는 모든 이를 환대하고 껴안기 위해 끝없이 확장되는 널찍한 품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 대신 주님께서 불 벽이 되어 주신다니 "사랑의 불"이 예루살렘을 에워쌀 것입니다.

재건될 새 성전, 그리고 새 예루살렘인 교회는 성벽에 구획 지어지지 않아, 넓이에 한계를 모르는 영원한 도성이 될 것입니다.


성 안과 성 밖은 차가운 돌벽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의 불 벽으로 가늠하게 될 것이고, 그 안에 머무르시는 주님께서 온 도성에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 되실 것입니다.

자기들 권위에 도전이 될까 두려워 주님 말씀을 외면한 바리사이들이나, 첫 번째 수난 예고 때의 충격이 두려워 입을 다문 제자들처럼, 혹시 즈카르야 예언자도 제 민족만을 위한 예루살렘 도성의 영화를 꿈꾸어 질문들을 그냥 삼켰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다행히 그는 묻고 또 물으며 하느님 뜻의 핵심을 향해 깊이 깊이 들어갑니다. 자기 계획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뜻만을 추구하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간결한 수난 예고에 말문이 막혀 더 여쭙지도 못하고 결국 감추어진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에 담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적 의미까지 가닿지 못한 채 두려움만 가득 안고 말씀의 여정을 중단한 모양새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말씀과 함께 걷는 여정 안에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어도 경청하고 순히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사심없이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하여"(즈카 2,15).


묻고 답하고 듣고 새기고 머무르는 사이 우리는 말씀과 결합해 하나가 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일치! 온 힘을 다해 말씀에 몰입하고 전념하는 사이 내가 말씀이 되고 말씀이 내가 되는 신비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우리, 두려움을 멀리 치워버리고 말씀에 한번 빠져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