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dariaofs 2019. 9. 30. 05:05


오늘의 복음 대목은 두 번째 수난 예고에 이어서 벌어진 장면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루카 9,46).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펼쳐지고 있네요. 그들에겐 서열과 힘의 논리가 여전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세속 가치에서 예수님 중심의 가치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아서일 겁니다.

"누구든이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루카 9,48).


어린이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을 바라봅니다. 얼마나 애틋하고 자애로운지요.


사실 어쩌면 지금 예수님 앞에서 논쟁하고 있는 제자들도 예수님 눈에는 이 어린이처럼 작고 여리고 약한, 그래서 소중한 존재일 겁니다. 그들이 큰 사람인 척 착각하고 있을 뿐 어린이에 불과한 존재들이지요.

예수님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신을 받아들이면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거라는 통 큰 발언을 거침없이 하십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인 어린이와 성자이신 예수님 자신, 또 당신을 보내신 성부 하느님까지 동일시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말씀을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대목에서도 만납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지요(마태 25,31-46 참조).

우리가 어제 부자와 라자로 일화에서 두 부류의 상호적 도움과 나눔을 제시받았다면, 오늘은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아예 가장 작은 사람이 되라는 초대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작아져라, 내려놓아라, 내려와라, 버려라, 비워라, 가난하게 되어라...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하고 힘도 영향력도 클수록 큰 사람이겠지만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서는 작을수록, 가난할수록, 텅 빌수록 큰 사람입니다. 허술하고 약하고 빈 자리만큼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어지는 제자들의 두 번째 이슈는 그들이 여전히 세상 때를 못 벗었음을 드러냅니다. 자칫 편가르기가 될 수 있는 소속과 구분의 문제입니다.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가 "우리" 중 하나가 아니기에 막으려 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막지 마라"(루카 9,50).


예수님 답변은 간결하고 위엄에 넘칩니다. 제자들은 그가 어디 소속이냐, 누구 편이냐에 무게를 두지만, 예수님은 그로 인해 마귀의 압제에서 해방된 영혼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누구라도 고통받는 이에게서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이라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가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는 제자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제1독서에서는 재건되는 예루살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즈카르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됩니다. 예루살렘은 주님 현존 안에서 평화가 넘치게 될 것이고, 주님은 이국 땅에서 시들어가는 당신 백성을 구해내어 데려오실 것입니다.

유배 후 재건될 예루살렘에 다시 모여들 백성은 이미 혹독한 이국살이로 작아진 이들일 터이고, 남아 있던 이들이야말로 침략자가 데려갈 가치조차 없었던 작은 이들이었지요.


하느님께서 그런 이들로 다시 예루살렘의 영화를 끌어내실 겁니다. 그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온에 커다란 열정을, 격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즈카 8,1).


예루살렘 재건과 성전의 건축은 인간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것도 그분께서 크고 "격렬한" 관심과 열성과 애착을 다해 이루시고야 말 일이지요. 백성을 향한 이 크고 격렬한 하느님의 열정이 그분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도록 끌어내렸습니다.


처음에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종래에는 수치와 치욕 속에 처절히 죽음을 맞은 사형수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가장 작은 이가 되길 자처하신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크고 강하고 높은 우상을 향해 달리는 세상과 역행해, 작고 낮고 약하고 고요하게 작은 이로 오신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 작은 이에게는 새 예루살렘의 평화가 잔잔히 차오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가정, 공동체, 직장, 관계들 속에서 점점 더 작아지고 또 작아지는 것이 예수님,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길이라면, 힘이 들더라도 욕심을 낼만한 일이지요.


그럴 자격도 없는 우리의 몸값을 당신 목숨으로 치르러, 섬기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