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사 독서들에는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는지에 관계없이 서로 협조해 두루 행복하길 바라시는 주님의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 누워 있었다"(루가 16,19-20).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비유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당대 유력 종교 지도층으로 부와 권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율법 준수와 신심 행위에도 열성을 다하던 이들이었지요.
예수님은 운 좋게 부잣집에 태어났거나 부자가 되어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사는 어떤 이,
그리고 굶주림과 질병 등 세상의 온갖 고초에 노출된 채 인간의 기본 존엄성이 훼손된 상태로 부자의 면전에서 목숨을 연명하던 한 가난한 이, 라자로를 등장시키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세는 사후에 뒤바뀌지요.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놓여 있어서"(루카 16,26).
저승에서 고통을 겪던 부자가 아브라함 곁에서 복락을 누리는 라자로를 제게 보내 좀 도와주게 하라고 소리 질러 청하자 아브라함이 한 대답입니다.
생전에 굶주리던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루카 16,21)지만 요구는커녕 부탁도 하지 못했지요. 그는 자기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소리를 낼 줄 모르는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부자는 당장 자신의 불편에 대해 호소하며 라자로를 보내라고 요구하지요. 그는 타인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온갖 사회적 정치적 행정적 시스템을 동원해 기득권을 쟁취하는 일부 부유층 권력가들을 상징합니다.
그의 내면에는 반드시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의식하는 우월의식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상에서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비록 빈부차이는 있었을지언정 큰 구렁같이 건널 수 없는 공간 따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잣집의 대문이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네요. 그집 대문은, 세상의 모든 문이 그렇듯 소통과 연대와 협력의 통로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의 건널 수 없는 구렁 이상으로 견고하고 위협적인 철벽이 되어 버립니다.
그 결과 부자는 그 구렁을 고스란히 마주하게 되지요.
제1독서는 아모스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불행 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아모 6,1)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로 활동한 아모스는 본래 유다의 목양업자였지요(아모 1,1 참조). 그는 시온 즉 예루살렘이 가리키는 남 유다와 사마리아라 일컫는 북 이스라엘, 곧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경고를 보냅니다.
그가 묘사하는 부유층의 모습은 호화롭고 자기본위적인 사치와 향락의 민낯입니다.
흔히 "내가 내 돈 가지고 즐기는데 왜?" 항변하기 마련인 유희는 곧이어 찾아올 이민족의 침략과 유배 때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게 될 신세로 환산될 것이고, 그들은 자기들이 무심했던 가난을 처절히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가진 것이 죄냐고 묻고 싶은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모든 부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집사가 되어 잘 사용하라고 맡기신 것이니 재물의 소유 그 자체가 죄악이 아닙니다.
다만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아모 6,6)고 예언자가 전한 말씀처럼, 자기 곁에서 굶주림과 질병과 소외와 상실로 망해가는 이웃을 외면할 때 하느님께 실망을 안겨드리게 됩니다.
우리 대문 앞에, 즉 우리 면전에 누워 있는 "가난"에 대한 방임, 무관심, 소극적 대처도 적극적으로 악의를 품고 누군가를 해치는 것만큼 하느님께서 아파하시는 세상의 상처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징벌을 후회하셨던 하느님(창세 8,21 참조)께서 반대로 '아뿔싸!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나눌 깜냥도 못되는 이에게 너무 많이 맡겼구나' 하고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언제든지 활짝 열릴 수 있고 안과 밖이 수평으로 만날 수 있는 문을 사이에 두고 부자와 라자로가 존재했다는 건 어쩌면 희망입니다. 하느님은 그 문이 열리길 바라셨던 겁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닫힌 문이 활짝 열리기를, 어떤 조건을 지녔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환대하고 동등히 교류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라자로의 "간절함" 안에 바로 그런 하느님의 간절함이 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부자가 라자로에게 필요한 음식과 약뿐 아니라 따뜻한 인사와 눈길을 주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아마 그랬더라면 그 부자는 라자로보다 더 많은 걸 받았을 겁니다.
사후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나누는 바로 그 순간에도 말이지요. 이는 나눔에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진실이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하느님의 사람"(1티모 6,11) 라 부르며 "훌륭한 신앙 고백"에 대해 치하합니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 6,12).
그런데 이 "싸움"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박해나 순교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내 집 대문 앞의 가난한 이에게 문을 열고 필요를 묻고 내 것을 나누는 일이 곧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늘 쉽기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주는 입장에서야 그들이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고 굽실대며 무엇이나 감지덕지하기를 바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가난한 이들도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약하고 상처입은 영혼의 소유자이지 천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나, 나누는 이나 받는 이나 오늘 들려주시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야 합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1티모 6,11).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구원은 기적에 있지 않고 말씀에 있습니다. 가난에 대한 권고 역시 갑자기 등장한 이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성경 안에 애초부터 담겨 있던 하느님의 혼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을 지닌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길 진정으로 "간절히" 바라시며 사람을 만드셨으니까요(창세 1,26 참조).
오늘 복음은 "징벌" 이야기가 아니라 "기회"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건너갈 수 없는 구렁이 가로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활짝 열어젖힐 수 있는 문과,
얼마든지 다가가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람, 가난한 이들이 대문 앞에 있다는 게 행운이 아니겠는지요?
가난은 고귀합니다.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나 구원으로 이끄는 교차점이 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유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기에"(복음 환호송 참조)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가난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어 부유함도 축복합니다. 이 모두가 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테니까요.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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