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 독서의 말씀들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힘을 운운하고, 독서는 파멸이 들이닥칠 주님의 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 11,15).
말을 못해 고통받던 한 형제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모함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표징을 요구하며 그분을 시험하려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분통이 터질 일인데 예수님은 차분하고 당당히 그들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주려 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상을 지으실 때 손가락으로 작품들을 만드신 하느님의 능력입니다(시편 8,4 참조). 말 못하는 이에게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도 악의 사슬에 묶여 있던 창조 때의 본성을 되찾아 주시는 하느님의 선하심 덕분이지요.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루카 11,24).
어떤 사람에게 들렸던 더러운 영이 자의로 나가거나 또다른 마귀와 야합해서 움직이면 그는 쉬이 되돌아 올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루카 11,26)을 데리고 다시 그 사람에게 들어가면 일곱이라는 완전한 숫자가 말하듯, 그야말로 끝장에 이르도록 그를 황폐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지요.
하지만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손가락의 힘으로 밀려났다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더러운 영은 다시 그 사람에게 되돌아 오거나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지요.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
예수님의 모든 구마와 치유는 이 명령을 깔고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재창조의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물 없는 곳"(루카 11,24).
그런데 더러운 영은 왜 하필 물 없는 곳을 찾을까요? 척박하고 황량한 사막, 광야를 떠올리게 하는 "물 없는 곳"은 더러운 영이 살기 딱 좋은 악의 서식지인가 봅니다.
"물"은 모든 것을 삼키는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 죽음을 건너감으로써 얻는 생명, 창조, 풍요를 또한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물 위에는하느님의 영, 성령께서 감돌고 계십니다(창세 1,2 참조).
더러운 영은 물 없는 곳, 즉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시지 않는 영혼을 새 은신처로 삼고자 노리며 찾아다닙니다. 그러다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하면 그는 제가 나온 먼젓번 영혼에게 돌아갑니다.
건강을 되찾은 그 영혼이 생명과 빛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성령의 기운 아래 머물러 있지 않는한 다시 더러운 영의 먹이가 되어버릴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구마와 마귀들의 자의적 움직임은 확연히 다른 결과로 이어집니다.
제1독서는 요엘 예언자가 전하는 심판의 날입니다.
"아, 그날! 정녕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이 들이닥치듯 다가온다"(요엘 1,15).
요엘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은 메뚜기 떼의 급습으로 자연이 극심하게 파괴되고 황폐해집니다.
"하느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질"(요엘 1,13) 지경이니 일반 백성의 굶주림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요. 그런데 예언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지독한 파멸이 들이닥칠 주님의 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몰아치는 예언의 목소리는, 그러나 위협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 주님께 부르짖어라"(요엘 1,14).
하느님의 명을 받은 자연의 공격은 물론 종말이라는 궁극적 심판을 앞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식으로 표현되는 회개,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통회(요엘 2,13 참조)입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으며 다시 돌아와 주님의 영 아래 살고 싶으니 받아들여 달라는 간절한 청원이지요. 온갖 위험과 파괴에서 구해주고 회복시켜 주실 분은 오직 하느님 당신 뿐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의 날, 종말의 심판은 죽음과 더불어 정화와 새 생명을 안고 올 새 창조입니다. 구약 말기의 예언자들이 전하였으나 아직 완결되지 않은 미래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예수님께서 들어올려지심으로써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났으니 모든 이가 주님께로 이끌려올 것"(복음 환호송)이라는 사실이지요. 이는 모든 이의 구원을 가리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 현존과 활동으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상태이기에 그 안에 어둠의 영들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의 세력도 존재하지요. 예수님의 치유, 그리고 우리의 정화와 회개의 노력은 어둠의 세력이 다시는 우리 영혼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든든한 방어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맞이할 주님의 날, 심판, 종말은 우리에게 "처음보다 더 나빠질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들어올려지심으로써 그 값을 모두 지불하셨으니까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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