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dariaofs 2019. 10. 9. 03:12



오늘의 말씀들 안에는 기도가 가득합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그동안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봐오기만 했던 제자들이 "드디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복음 안의 배열 상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마르타, 마리아 자매를 방문하신 뒤의 일입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선택했다는 "좋은 몫"이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갈망이 싹텄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매우 바람직한 변화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기적과 표징에 쏠렸던 눈길이 그 모든 활동의 원동력인 기도로 옮겨지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에서 보호"(루카 11,2-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피조물이며 하느님 자녀인 인간으로서 주님께 바쳐야 할 기도의 골자를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해 달라는 그분 현존의 청원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이곳이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청원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당신께 의탁하며 살 수 있도록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매일을 꾸려갈 양식을 바라는 청원입니다.


"용서"는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를 주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풀어나가길 바라는 청원입니다.
"유혹에서 보호"는 어둠과 악의 세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청해야 할 핵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유다인 남성인 제자들이 그동안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예수님에게서 기도와 말씀과 행동의 일치, 통합을 발견했기에,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결정하는 바로 그 기도를 배우고 싶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 그들의 바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주님의 기도" 안에는 그동안 제자들이 해오던 모든 기도가 수렴되고 있고, 또 앞으로 제자들이(우리들이) 바칠 모든 기도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 요나의 대화가 펼쳐집니다. 허물없는 사이에서나 오갈 만한 내용이 요나의 입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요나 예언자는 (좋게 말해) 꽤나 용감하고 대담한 성정을 지녔던 듯합니다.


 자칫 무례하고 즉흥적, 자기중심적이며 재차 죽음을 운운하는 자포자기적 비관적 성향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부분이 비치기도 합니다만...

이 대화 내용이 불편하십니까? 요나가 괘씸하게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그의 미숙하고 단순해 보이는 태도가 속시원히 공감이 되시는지요? 사실 이 대목은 기도의 현실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피조물이 서로를 듣고 답하는 솔직하고 진솔한 순간입니다. 요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한계, 불평과 불만, 아닌 줄 알면서도 어깃장 놓는 심보까지 감히(?)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 거짓 없이 드러냅니다.


어쩌면 그가 그만큼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고 있다는 반증도 되지요.

이에 하느님은 인내롭게 대응하십니다. 요나가 아무리 유치하게 나와도 그의 눈높이에 맞게 표징을 일으키시고 적절한 가르침으로 연결하시면서요.


이처럼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니네베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요나에게도 드러내십니다. 요나 역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구원으로 인도되어야 할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우아하게 내 좋은 면만 보여드리는 기도를 고수하고 있다면, 오늘 요나의 모습이 참 생소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오늘 하느님과 요나의 대화는 진솔한 기도의 참 좋은 예로 보여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하느님 앞에 미숙하고 이기적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철부지일 뿐이니까요. 그런 자기 실체를 가감없이 드러낼수록 이미 그 꼴을 다 아시는 하느님과 얼른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내게 맞는 맞춤형 응답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가리는 게 많을수록 겹겹이 덧씌운 허울을 벗기느라 시간과 에너지만 더 들 뿐입니다.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세상의 어머니들, '내가 낳았으니 내가 책임진다'는... 이런 표현 많이들 하시지요? 바로 하느님 마음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은 우리를 벌하려 준비하고 계신 잔혹한 심판관이 아니라, 당신이 낳은 자녀들의 갈지자 걸음, 한눈 팔기, 딴청, 청개구리 짓, 모르고 짓고 알고도 짓는 죄악까지 한없이 동정하고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그런 자녀(우리들)로 인해 창자가 다 끊어질듯 애끓는 마음에서 흘러나온 진액입니다.

요나의 기도도 주님의 기도도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를 향해 가는 기도의 여정입니다. 언젠가 탄식도 바람도 청원도 거대한 침묵 안에 녹아들어, 말이 필요 없는 기도, 존재의 기도로 이어지겠지요.


그때는 우리와 그분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알고 내가 그분을 알기에 사랑 안에 녹아들어 둘로 가를 수 없는 상태, 내가 기도가 되고 기도가 내가 되는 신비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영혼을 들어올려"(화답송) 그분께 은밀히 속삭입시다. "제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