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믿음"으로 모아집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전제가 입당송에서 성대히 울려퍼집니다.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인이시옵니다"(입당송).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모든 만물을 돌보시고 명령하십니다. 만물은 그분께 복종합니다. 명령하시는 그분 안에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존재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복음의 대목은 사도들의 청원으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청원이기도 하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먼저 '믿음의 힘'(루카 17,5-6)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이어서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루카 17,7-10)를 말씀하시지요.
얼핏 내용이 다른 두 개의 가르침으로 보였던 것이 오늘은 두 내용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다가왔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시길 청하는데 예수님은 달라는 믿음은 주시지 않고 '믿음의 효능'을 말씀하십니다. 즉,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멀쩡하게 땅에 잘 심겨진 나무를 바다에 옮겨심는 것같이 얼토당토 않은 일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일도 믿음으로 명령하면 피조물이 본성을 바꾸어 복종한다는 뜻일 겁니다. 이는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지혜 19,6)된다는 지혜서 저자의 고백을 떠올리게 하지요.
이어서 주인과 종이 등장합니다. 신분제 아래서는 아무리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종이라도 주인을 위한 의무는 끝이 없게 마련입니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루카 17,8).
주인의 이 요구는 지당합니다. 돌무화과나무에게 바다로 옮겨심어지라는 명령처럼 얼토당토 하지도 않습니다.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내심 좀 부당하게 느껴질 수는 있으나 인륜과 순리를 거스를만큼 악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으레 그랬으니까요.
주인은 자기가 종에게 하는 명령에 종이 복종하리라는 걸 알고 또 믿습니다. 사회제도 안에서 이루어진 관습이나 합의, 약속이니 그렇습니다. 종의 복종은 주인의 믿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특별히 파행을 꿈꾸지 않는 한, 명령을 이행함으로써 자기에게 부여된 신분적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입당송에서 노래했듯이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실 때, 그분은 이미 우리를 믿고 계시는 겁니다.
비록 그것이 고된 노동 후의 잔업 요구일지라도, 또 그동안 살던 땅에서 뽑혀 나무의 생장 조건에 해가 될 것이 뻔한 바다로 옮겨가라는 명령일지라도, 하느님은 우리가 순종하리라는 걸 믿으시기에 그렇게 하십니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믿으십니다! 명령하는 이의 믿음과 신뢰는 명령받는 이의 기꺼운 순종을 부릅니다. 모두 주인의 권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때"에 대한 예언자의 한탄 섞인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입에 담아 전하건만 정작 이루어지지는 않으니 예언자로서 면이 서지 않을 뿐더러, 조롱과 비웃음을 사게 되니 그렇습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하바 2.3).
주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주님의 때"는 늦어지는 게 아니라 늦어지는 듯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기다려야 합니다.
사실 기다림은 고요한 투쟁, 침묵의 투쟁입니다. 그리고 이 투쟁은 반드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상대방이 꼭 온다는 믿음이 있을 때 시간이 늦어져도 기다리는 것처럼, 믿어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과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다'(2티모 1,13 참조)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거나 꾸며낼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하고, 종에 불과한 우리에게 품고 계신 하느님의 믿음이 우리에게까지 옮아와서 형성된 덕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주인은 종을 믿고, 종은 주인의 믿음이 헛되지 않게 따릅니다.
명령과 복종, 상하 종속 관계처럼 보이나 실은 믿음으로 긴밀히 연결된 두 존재 사이의 관계성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성은 각자의 역할을 바꾸는 대전환의 역설로 이어집니다.
예수님 친히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밝히시며 종의 자리를 꿰어차셨고, 사도 바오로 역시 그분이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필리 2,7)고 이야기합니다. 주인이 종이 되고 종이 주인이 되는 신비입니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루카 17,7).
종이 되신 주인께서 우리가 명령(청)하기도 전에, 당신 몸과 피로 우리가 먹을 것을 친히 준비해 내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먼저 흡족히 배불리신 후에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실"(루카 17,8)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충만해지기 전까지 그분은 목마르고 배고프고 허기진 사랑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종이 되신 주인께서 겸허히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걸 다, 생명까지 다 내어주셨으면서도 생색을 내기는커녕 더 못 주셔서 안달하십니다.
무얼 더 줄까 두리번두리번 우리 주위를 살피시다가 비고 약하고 허물어진 곳이 보이면 놓치지 않고 채워주는 분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종이 되신 마당에 본래 종인 우리가 무얼 더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앞에서 종처럼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발까지 씻어 주시는 분(요한 13,1-20 참조) 앞에서 믿음 외에 어떤 명령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이렇듯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과, 피조물이고 종인 우리 사이를 단단히 엮어 주는 끈입니다. 믿음으로 "당신을 바라고, 당신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 분"(영성체송)이시니 우리가 그분께 되돌려드릴 것은 믿음입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쓸모없는 종임을 고백하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믿음에 보답하는 한 주간 되시길 두손 모읍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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