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은 우리를 기도와 활동의 리듬으로 초대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예수님을 모셔 들인 마르타가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데도 동생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꼭 붙어 앉아 언니를 도와줄 생각조차 없으니 마르타는 속이 탑니다.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마르타가 주님께 명령 비슷하게 청합니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마음이 짠합니다. 주님을 더 잘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한 소리이니 탓할 수 없지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얼핏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옹호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마르타를 염려하시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몫을 사랑해야 타인의 몫도 존중하는 법인데 지금 마르타는 마리아의 몫을 중단, 보류, 대체 가능한 것으로 경시함으로써 동시에 제 몫에 대해서도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으니까요.
마르타가 마리아를 그녀의 몫에서 끌어내어 다른 몫, 자기의 몫을 지우려 한 의도에 살짝 아쉬움이 드는 것은, 마르타의 몫은 지금 그녀에게 부여된 최적의 은사이고, 마리아의 몫은 마리아에게 최적의 은사임에도 마르타가 지금 그걸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관상을, 마르타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어느 한 쪽만 완벽하게 실행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봉쇄 담장 안의 관상수도자나 사막의 은수자도 노동과 활동 없이 기도생활을 이어갈 수 없고, 활동의 최전선에서 헌신하는 선교사들도 기도 없이 그 소명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관상)와 활동의 몫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공통의 의무입니다. 기도에 더 전념할 때가 있고, 기도에서 쌓인 사랑의 힘을 활동 안에서 내어 놓아야할 때가 있지요.
기도와 활동은 대립 가치도 별개의 가치도 아닌, 그리스도인 삶에서 둘 다 자연스럽게, 때 맞춰 드러나야 하는 요소들입니다. 저마다 리듬이 다를 뿐이지요.
지금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관상합니다. 그녀는 약하고 여린 모든 감각을 힘차고 거대한 말씀의 소용돌이에 내어맡긴 채, 더 깊은 고요와 침묵으로 응집되어 갑니다.
그리고 마치 태아처럼 하느님 자궁 안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 소음과 자극과 욕망이 배제된 말씀의 진공 상태에서, 하느님이라는 모체에서 전해지는 소리와 진동을 경청하며 탯줄을 타고 스며드는 양분을 섭취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언니의 분주함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마리아는 그 깊은 곳에 잠겨 있습니다. 그러니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그녀의 입장을 대신 설명해 주실 수밖에 없었지요.
제1독서는 요나 예언자의 회심과 활동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내렸다. ...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요나 3,1-3).
우리는 요나가 받은 주님의 첫 번째 말씀과 그 결과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험한 파도를 거쳐 오늘 두 번째 말씀이 내립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 죽음과 같은 진공 상태 안에서 예언자 소명의 기초를 '가나다'부터 다시 배우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미 어느 정도 기도의 상태에 이른 듯합니다. 자기 뜻과 욕구의 출렁임이 멈추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따를 준비가 된 것이지요.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요나 3,3-4).
요나의 기도는 즉각적으로 활동을 낳습니다. 들은 말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예언자의 DNA가 깨어난 듯합니다.
받아들여질지, 진짜 이루어질지 미리 넘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은 말씀만 충실히 전하고 있지요. 그에게 큰 물고기 뱃속은 하느님의 자궁과 같은 원초적 일치의 본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요나 3,5).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환락과 사치를 즐기던 이방민족이 이름도 모르는 뜨내기 히브리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이다니요!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결국 기도로 준비된 예언이 큰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들은 요나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임금까지 나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요나 3,8).
이방인 임금이 기도의 진정한 골자를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 거룩함을 알고, 그분 앞에 자기가 얼마나 속되고 부정하며 나약한 존재인지를 뼛속까지 인식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힘껏"!!!
진정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설렁설렁, 대충,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상대가 듣거나 말거나, 아님 말고... 하는 식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온 존재를 다해 힘껏, 몰입과 헌신과 집중을 다해 사랑하는 분을 응시하면서 그분을 온통 흡수해버릴 듯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분께 빨려들어가지요. 온전히 흡수되어 버립니다. 그분 심장 안까지, 그분 자궁 속에 이르기까지, 그분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기까지...
"하느님께서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요나 3,10).
요나의 회심이 니네베 사람들의 회심을 가져왔다면, 니네베 사람들의 회심은 하느님의 회심으로 이어집니다.
참 아름답지요... 하느님은 이로써 실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길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흐뭇하고 좋으실 겁니다. 그분 말씀의 목적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기도(관상)와 활동,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제 때에 맞춰 온전히 머무르고 온전히 발휘될 때 하느님이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영혼을 성장시키듯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두를 통해 우리 자신의 구원은 물론, 이웃과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 당신 자궁 안에 우리를 품었다, 세상을 향해 출산하기를 반복하시는 하느님께서 이 모두를 통해 영광 받으시니,
우리는 기도하고 봉사하는 소명, 말씀을 경청하고 선포하는 소명을 그침 없이 이어가야합니다. 이 리듬, 이 사이클 안에서 사랑과 일치와 구원이 무르익어갈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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