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10.13. 연중 제28주일 - 오상선 신부

dariaofs 2019. 10. 13. 02:09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구원의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던 예수님 앞에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마주오며 소리 높여 간청합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라는 젊은 예언자가 자신들과 같은 나병은 물론 갖가지 질병을 치유해준다는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만이 자기들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나병이라 불리던 한센병은 현대의학에서는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지만 모두가 무지했던 시대에는 마치 천형처럼 여겨졌지요. 환자들은 육신의 고통보다 하느님께 벌 받은 자라는 낙인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로 더 큰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마주친 장소가 사마리아도 아니고 갈릴래아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이고,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기 전의 한 지점이라는 장소적 배경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어떤 마을 공동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그들의 슬픈 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위치라서 그렇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예전에 나병 환자를 고쳐주실 때에는 모두가 피하던 그에게손을 내밀어 직접 대시며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는데(루카 5,13 참조) 오늘은 직접 치유하는 절차를 생략하시고 사제에게 가라고만 하십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 상태가 호전되면 사제에게 보여 치유를 확인받는 율법 규정(레위 14,2-3)을 준수하라고 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이 그렇다면, 이미 예수님 마음에는 그들에 대한 연민이 번져 치유를 결심하신 것이니, 그 치유가 일어난다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환자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지만, 예수님 말씀을 듣고 사제에게로 발길을 돌립니다.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마르 11,24)는 가르침이 그들 안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는 도중에 어느새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믿고 가는 동안 치유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 놀랍고 은혜로운 체험은 환자 무리를 두 방향으로 가릅니다. 아마도 아홉 명은 서둘러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고 가족이 있는 마을로 바삐 뛰어갔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들에게는 온전해진 육신으로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과 소속에 대한 결핍과 갈망이 무엇보다 컸던 게지요.

"한 사람은 ...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5-16).


한 사람,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되돌아 옵니다. 제도적 확인과 소속의 회복보다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극적인 순간에 자동반사적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가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유다인 입장에서 부정하다고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누구보다도 철저히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시고 있는 셈이니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열 명의 환자들 모두 말씀에 순종하여 육신의 질병을 치유받았습니다. 그 중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한 명은 그에 더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감사는 육신의 치유를 완성하고 확증하는 마침표인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여는 문입니다.

제1독서 대목는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 나아만의 나병 치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언자 엘리사는 그에게 다가와 손을 얹는 직접적 치료 행위 대신,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이런 무성의해 보이는 대우가 못마땅했지만 부하들의 권유로 이에 따르지요. 그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일러 준 대로"(2열왕 5,14) 실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말씀은 듣는 이의 순종으로 완성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만일 엘리사가 직접적인 치료 행위를 했다면 이방인 입장에서 엘리사의 능력으로 치유되었다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엘리사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선으로 자기 역할을 한정했기에 이처럼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려집니다.

제2독서에서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복음의 능력을 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2티모 2,10).


하느님의 말씀은 자유롭고 한계를 모르며 경계를 넘나듭니다. 말씀은 사람이 처한 마치 천형과도 같은 어떤 극한의 상황도, 비참한 처지도, 막막한 현실도 녹여내고 건너가게 하는 힘입니다. 단, 우리가 그 말씀을 믿을 때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2티모 2,13).


그분의 성실함!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야 마는 이유입니다. 그분은 당신 입에서 나간 말씀, 아니 그 말씀이 미처 소리를 입기 전에 품은 마음의 연민과 결심까지도 끝까지 성실히 완성하시는 분이시지요.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그러니 그런 주님의 성실함을 믿음으로써 치유를 얻고, 감사로써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치유와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얼마간 어느 정도 치유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족 같지만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지요(요한 4,9 참조).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열 명의 나병 환자는 유다인, 사마리아인, 또 다른 이방인 할 것 없이 한 무리를 이루어 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공동체에서 저마다 소외되고 밀려난 이들이 사마리아 고을도 갈릴래아 고을도 아닌 그 "사이"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의지하고 지내며 함께 예수님께 나아간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누가 진짜 "병든 이"일까 하는 질문이 올라옵니다. 차별과 분열, 무시와 소외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이들이 "병든 이"일지,


아니면 병들고 허물어진 육신을 끌어안고 서로 기대고 보듬으며 함께 살 길을 찾는 이들일지... 오늘은 예수님께 다가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얼굴이 새롭게 보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