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대립되는 개념의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특히 복음은 오늘부터 사흘간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 선언이 이어질 것이라 분위기가 자못 심상치 않게 흘러갈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사이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손을 씻는 정결 예식을 이행하지 않고 식탁에 앉으신 것에서 시작됩니다. 혹시라도 부정한 사람, 사물과 닿아 부정하게, 불결하게 되었다면 손을 씻는 의례를 통해 정결함을 회복한 뒤 음식을 먹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니까요.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이처럼 예수님께서 돌려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생각에 정면으로 대응하십니다.
겉과 속. 외부로 드러나는 "겉"과 내면에 자리한 "속"은 모든 피조물, 특히 사고하고 욕망할 줄 알도록 만들어진 인간의 양대 기본 구조입니다. 우리 모두는 타인과 세상에 보여지는 부분과, 자신만 아는 감추어진 부분을 모두 지니고 있지요.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카 11,40)
바리사이들이 간과하고 또 우리도 때때로 잊는 진실이겠지요.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께는 우리의 겉이나 속이나 매한가지로 환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를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 ...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 당신께 감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시편 139,1.13.15)라고 고백하지요.
주님께는 겉과 속이 하나입니다. 그분 앞에 우리의 겉과 속이 구분도 경계도 없이 하나로 펼쳐져 있으니 그분께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겉꾸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실까 머물러 봅니다.
거룩한 척, 정결한 척, 의로운 척, 선한 척, 지혜로운 척 애쓰는 그들과 우리에게 그분께서 이렇게 한 마디 던지시지 않을까요.
"됐다! 치아라(치워라)! 용 쓰지 마라!"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듬뿍 담긴 일갈이지요. 오늘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이 분노 서린 질책이라기보다 그런 안타까움과 애닲음으로 다가옵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것과 세상 악의 것이 여러 단어로 표현을 바꾸어 등장합니다. "진리 : 불경 불의", "하느님 찬양과 감사 : 허망하고 우둔하고 어두운 마음", "지혜 : 바보", "불멸 : 썩어 없어질", "진리 : 거짓", "창조주 : 피조물."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로마 1,225).
사도 바오로는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는 하느님의 본성, 즉 영원한 힘과 신성"(로마 1,20 참조)을 얕은 꾀와 욕망과 탐욕으로 덮어버린 불의한 사람들의 행태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대신 보이는 피조물을 하느님 삼아 자기들 편한 대로 편집하고 조작해 섬기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바리사이들처럼 말입니다.
표출되는 행동이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이 아닐 때 우리는 위선이라 부릅니다.
위선은 대개 자기 영광과 명예욕, 자기 만족을 목적으로 하지요. 규정과 의례를 준수하는 외적 행위 역시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내면의 발로일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행위만 보면 사람은 그 속까지 알아차리지 못해도 하느님은 아시지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해법을 제시하십니다. 그들 속이 "탐욕과 사악"(루카 11,39)으로 가득하다는 걸 모르지 않으시지만, 탐욕과 사악도 하느님의 선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겁니다.
그들처럼 우리 내면도 온갖 욕망과 죄스런 생각과 불안정하게 출렁이는 감정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 주변을 맴돌다 시시각각 영혼을 찔러보는 어둠의 실체를 칼로 베어내듯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없는 듯 모른 척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인간 실존을 부정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게서도 멀어지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바리사이들처럼 자기 내면에는 눈을 딱 감은 채, 한껏 거룩하고 의로운 척, 타인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겉만 공들여 가꾸는 신앙이어서도 곤란합니다.
내면과 외면의 분열과 각극이 커질수록 '자아'가 하느님과 제 자리를 착각하게 되고, 결국 자기 영광의 우상을 좇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이니까요.
그러니 먼저 인정합시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서 "탐욕과 사악"이라 부르신 온갖 악의 충동이 끼어듭니다.
불교에서 오욕(식욕, 물욕, 수면욕, 명예욕, 색욕) 칠정(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이라 했던가요. 우리 내면이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만큼 온전히 깨끗하지도, 아름답고 진실하고 선하고 거룩하지도 않다는 걸 겸손히 받아들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불순하고 불결한 실체가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길이 있으니, 바로 자선이라고 예수님께서 귀뜸해 주시네요. 자선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착한 행위지요. 선하게 보이기만 하는 위선이 아니라, 진실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나눔과 희사가 자기 영광과 명예욕과 자기 만족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때 진정한 자선이 되겠지요. 혹 그런 지향이 부차적으로 스며들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누군가의 유익을 위한 직접적 선행이 자선입니다.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건 그것이 자선으로 표출될 때는 도움을 받는 이에게 하느님의 이름과 사랑을 일깨우기에,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렇게 표현된 자선은 언젠가는 결국 자선을 행한 이의 내면의 동기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은총의 역습이라고나 할까요...
오늘 바리사이들에게 내놓으신 예수님의 처방전은 자선입니다. 겉과 속이 통하는 선행, 자선으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을 극복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처방전에는 승화의 은총이 숨어 있습니다. 속에 든 것으로 자선을 베풀 때 그 불결함, 부정함도 하느님의 일로 승화되어 존재를 정화하는 은총으로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니 "괜한 데 용 쓰지 마라!"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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