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계속됩니다.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율법에서 요구하는 바를 잘 지키는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나 예식 등 보여지는 것은 나무랄 데 없이 준수하는 이들이라 누구에도 이렇게 정곡을 찔린 적이 없을 겁니다.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
이 말씀 안에는 그동안 바리사이들에게 무시당해온 하느님의 속내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을 받은 선택된 백성으로서 유다인이라면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영광과 흠숭과 사랑과 찬양을 받아 마땅한 분이심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또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고 보물이며 서로에게 선물임을 믿고 받아들여야 옳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은 정의롭고 공정하신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이웃에 대한 연민과 자비, 나눔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우리의 뜨겁고 열렬한 사랑입니다. 이는 형식적인 거리만 유지해서는 어림도 없는 내밀한 관계성을 가리키지요.
어쩌면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자기가 속한 제도를 공고히 해 주는, 그래서 자기의 신분적 기득권을 지켜주는 "보스" 정도로 생각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갈망하고 원해서 친밀히 다가가 관계를 맺으며 마음을 다해 섬기는 사랑, 그분 마음을 헤아려 드리는 섬세한 경청의 사랑 대신 의무와 책임 완수로 정례화된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관계 말입니다.
"윗자리를 좋아하고 ...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예수님은 계속 바리사이들의 실체를 들추십니다. 하느님보다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즐기는 그들은 실상 자신을 하느님 자리에 놓고 싶어한 것이지요.
그러니 무지와 삶의 노고와 생계에 짓눌려 하루하루 단순히 살아가는 이들을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자들"(요한 7,49 참조)이라 단정하고 죄인의 멍에를 씌우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하느님 대신 심판의 권한까지 거머쥔 무소불위의 힘을 지금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들추고 계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실체에는 살며시 눈을 감고 타인의 약함에는 눈을 부릅뜬 채 심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강한 어조로 이야기합니다.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로마 2,1).
남을 심판하는 그 자체가 스스로 심판받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 자비와 사랑에 감싸인 이들은 남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부족함과 약함을 추상같이 단죄하고 심판하는 냉혈하고 완고한 마음 자체가 이미 그가 받은 징벌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2,11).
하느님은 악인도 선인도, 율법 준수자도 죄인이라 낙인 찍힌 이도, 부자도 빈민도, 유다인도 이방인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모두를 조건없이 품으시지요. 이것이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은 이 의로움 위에 자비와 연민의 사랑을 덮고 심판하시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감히 하느님의 고유 권한인 심판을 그분 손에서 빼앗아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되겠지요.
그분만큼 의로울 수 없고 그분만큼 사랑할 수 없으니, 엄밀히 말해 심판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심판은, 성경에서 명확하게 강조하는 대로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백성아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다"(화답송).
독서와 복음의 강하고 직설적인 어조와 달리 화답송은 내내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이는 그 믿음으로 의로워질 것이기에, 그가 주님 앞에 쏟아 내어 펼쳐진 마음에 설령 죄와 악과 실패와 한계가 섞여 있어도 하느님은 그와 대적하는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넓은 가슴을 열어 그를 품고 숨겨주는 피신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사랑의 심판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셨지요.
"그분의 호의는 우리를 회개로 이끄시려는 힘"(로마 2,4 참조)입니다.
그러니 심판과 단죄의 눈을 치켜뜨기 전에 우리가 받은 사랑에 먼저 눈을 돌리면 좋겠지요.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자비, 연민과 호의를 기억하는 이는 그것으로 타인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심판이 심판이 아니고 사랑이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입당송).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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