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평화와 분열, 죄와 의로움, 죽음과 영원한 생명 등 상반되는 가치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느껴집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성경에서는 불이란 표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대목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계약(창세 15,17)에서, 야훼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소명을 주신 불타는 떨기 대목(탈출 3,2)에서, 시나이 계약(탈출 20,18)에서,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일당의 대결(1열왕 18,38)에서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불은 음식을 익히고 단단한 금속도 부드럽게 변화시킵니다. 데워주고 온기를 유지해 줍니다. 또 닿는 존재를 태워 소멸시키기도 하고 정화시키기도 합니다. 불은 옮겨 붙은 대상과 둘로 가를 수 없는 한 덩이가 됩니다. 곧 타자를 불이 되게 합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50)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묵시 3,16) 세상에 당신 몸을 던져 불을 붙이시려는 겁니다.
세상 창조 이후 내내 뜨겁게 다가오셨던 성부 하느님과 열렬히 한 몸이 되지 못한 미지근하고 무심한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십니다. 당신 스스로 불이 되기로 하시는 겁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님은 평화가 아닌 분열을 주러 오셨습니다. 가족 안에서, 민족 안에서 서로 맞서고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아 종교를 갖는 세태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하지만 진짜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분열은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던 이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를 통해 기존의 관념이 찢겨져 나가는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율법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는 이들은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이 불처럼 율법을 삼켜 사랑 안에 한 덩어리로 타오르는 광경에 경악할 것입니다.
가족, 민족,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끈이 온갖 불의와 탐욕, 배타적 우월주의, 이기심, 허영이라면 그 안의 누군가가 각성하고 회개하여 불이 되어야 합니다.
위장된 평화에 안주하거나 거기서 얻은 부정한 이득으로 배불리기보다 차라리 맞서고 갈라서고 찢겨나가야 합니다. 그 틈새로 새어든 불길이 모두를 소독하고 정화하고 거룩하게 하도록 내맡겨야 합니다.
유다인들, 특히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등 사회적 종교적 기득권층은 예수님께서 당신 친히 사랑의 불이 되어 이 세상에 지르신 불을 꺼버리고 싶어했지요. 유다교의 견고한 성역은 예수님에게서 촉발된 "새로운 길"(사도 9,2)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분노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신념 표출이니까요. 새로움은 늘 기존 질서를 진지하고 진정성 있게 지켜온 이들의 저항과 거부를 맞닥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은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건재합니다. 사그라들기는커녕 온 세상 곳곳으로 번져나가 태우고 뜨겁게 하고 정화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게 진리가 아니라고 외치는 이 불 앞에서 거짓 평화는 검불처럼 타서 공중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악으로 결집된 관계도 무너지고, 선을 가장한 욕망도 형체 없이 녹아버릴 것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천 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피흘리고 박해받고 순교한 모든 증거자들 안에서 예수님은 짓눌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 한가운데서 제도와 고정관념과 물신주의로 탄압받는 가난한 이들, 의인들 안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짓눌리고 계십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란 순결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희생제사의 불길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신 그 순간에 시작되어 인류를 악의 손아귀에서 모두 다 빼내어 완전히 정화하시고 완전히 성화시키실 날, 곧 주님의 날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고대하고 희망하는 날이지요. 비록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피조물 안에서 짓눌리고 계시더라도, 결코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길로 거짓 평화에는 분열을, 거짓 결속에는 새 질서를 선고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죄와 의로움에 대해, 죄의 결과인 죽음과 의로움의 열매인 영원한 생명에 대해 지치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종으로 철저히 매여 살아온 이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의롭게 한다는 가르침이 낯설고 위험천만한 모험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게 하십시오"(로마 6,19).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성화에 이르는 방법으로 차가운 "율법서"를 제시하지 않고 뜨거운 믿음, 뜨거운 사랑으로 얻는 "의로움"을 제시합니다. 단죄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그 안에 담긴 하느님 사랑의 뜨거운 불 속으로 다가오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로마 6,23).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의 그 불에 정통으로 맞은 이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불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활활 타올라 흠도 티도 없이 순결해진 영혼은 그 자체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불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그 불길을 통해 누리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먼 미래의 선물이 되기 전에 이미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선물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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