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합리화의 생채기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이스라엘에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경건한 유다인을 가늠하는 척도였지요. 특히 단식은 속죄의 기능이 있어서 자신, 가족, 민족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와 형벌을 진정시킨다고 믿었지요.
이처럼 단식이 기본적인 수행 행위인데도 드러내어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꽤나 의아했을 겁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르 2,19)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혼인 잔치에서는 누구도 단식하지 않지요. 사랑이 열매를 맺는 축제 기간 동안에는 누구에게나 한껏 기쁘고 흥겨울 권리가 보장됩니다. 아니, 마땅히 즐겁고 행복해야 하지요.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알아들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핏기 없이 제도화된 단식의 본 의미를 흔들어 깨우시는 겁니다.
단식은 음식 섭취를 중단함으로써 몸의 욕망을 제어하고, 탐욕했던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징벌적 성격도 가미된 금욕 수행 방법이긴 하지만, 그 깊이 안에는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아름다운 열쇠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이 단식이 하느님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이유는 잘못을 범한 자기를 괴롭히고 벌해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비워 정화함으로써 창조 때의 본 모습을 새로 회복한다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단식은 욕망과 탐욕으로 치달았던 자신을 잠시 멈추고 "주님, 당신이 저를 처음 만드셨을 때 어땠지요? 그때처럼 다시 맑고 순수하게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라는 속삭임이 전제된 수행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혼인 잔치 안에서 한창 신랑이신 하느님과 사랑 중에 있는 영혼에게 인위적 비움이나 고행 같은 수단은 불필요합니다.
이미 목적지에 가 닿았으니, 도달하는 데 필요한 이동 수단을 다시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혼인 잔치에서 그분과 나누는 희열이 곧 정화이고, 누리는 사랑이 곧 곧 비움입니다.
사람들 이목과 제도에 편승해 습관이 되어버린 단식은, 하느님께 날마다 새롭게 드려야 할 뜨거운 헌신과 열렬한 사랑을 배제한 요식행위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굶는 행위를 사랑처럼 합리화하는 것이지요.
사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의례와 규칙이 이 합리화를 돕기도 하지요. 사랑 없는 단식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첫 임금인 사울의 잘못이 드러납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 다만"(1사무 15,20-21)
이 "다만"이 문제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변명에서 사울은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합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두 전멸시키라는 하느님 명을 어겼지요. 그는 보기에 탐스럽고 훌륭한 것들을 아깝게 여겨 남기고,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없애버리며 하느님의 눈을 속이려 했습니다(1사무 15,9 참조).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탐스런 제물로 불순종을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주님의 것인 세상 만물을 그분 뜻을 어겨가며 주님께 바친다고 공로가 될 수 없으니까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율법주의로 박제되어가는 이스라엘에 하느님께서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일깨우고 완성하실 아드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율법은 한 점 한 획도 사라지지 않고, 예수님의 피인 새 포도주로 맺는 계약을 통해 "사랑"으로 모아질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받은 이들은 혼인 잔치 바깥에서 "사랑"이라 쓰여진 간판이나 닦고 있기를 그만 끝내고, 또 "사랑"이라고 쓰여진 허울을 뒤집어쓴 채 속으로 다른 잇속 챙기기를 멈추고, 새 포도주에 취해 "사랑" 안으로 쑤욱 들어가야 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그 안에서는 합리화를 눈씻고 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 습관적 요식행위가 아닌 진짜 사랑만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앞에서 우리, 변명하지 맙시다. 합리화하지도 맙시다. 그냥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이지만,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떠날 수 없다고 솔직히 고백합시다.
스스로를 검열하고 단죄하던 율법주의는 떠나보내고, 눈치 보지 말고 새 포도주의 시대, 사랑의 시간으로 들어갑시다. 아직 신랑을 빼앗기지 않았으니 그 신랑과 함께 사랑에 취해 맘껏 기쁘고 행복해도 좋습니다.
그 안에서는 "굶었느냐 안 굶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이는 안 먹어도 먹은 듯, 굶어도 안 굶은 듯 충만합니다. 이런 우리로 인해 주님마저 흡족하고 뿌듯하실 겁니다. 이렇게 혼인 잔치는 절정을 향해 갑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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