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3월 14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dariaofs 2020. 3. 14. 06:57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방향성'을 관상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

평소 율법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라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와 죄인이 예수님을 향해 모여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을 향합니다. "들음"으로써 삶의 미혹과 진동을 떨쳐내고 구원의 희망이라도 실낱처럼 건져보려는 간절한 바람이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루카 15,11).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환대하는 예수님에 대해 투덜대자 예수님은 저 유명한 비유를 들려 주시지요.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산 작은 아들과, 아버지 곁에서 스스로를 종처럼 비하하며 산 큰 아들 모두를 향하는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20).

작은 아들은 현실의 세리와 죄인들처럼 아버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방향성은, 먼저 떠났었고 길을 잃었으며 실패했고 비로소 자기 처지를 자각했기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주님을 향하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짓거나 그분을 등질 필요는 없지만, 많은 경우 죄와 어둠은 은총을 부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루카 15,28).

아버지는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작은 아들을 조건 없이 환대했지만 형은 동생이 몹시 불편합니다.


아니, 그런 놈을 다시 거두어 최상의 대우로 복귀시키는 아버지가 못마땅한 것이지요. 큰아들은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 잔치의 현장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어둠이 그들을 밀어냅니다. 생명의 잔치에서 일렁이는 기쁨을 배척합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착실한 모범생 큰아들이 당신 곁에서 이토록 사랑을 갈구하며 이토록 외로웠다니 아버지는 속이 탑니다. 그래서 그를 달래며 마음을 돌리려 합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루카 15,12) 주었다고 했습니다. 작은 아들만 아니라 큰아들도 분명 제 몫을 받았지요. 제 것을 제 것으로 누리지 못한 큰아들의 자발적 소외와 두려움이 오히려 안쓰럽습니다.


자유인이면서 스스로를 종처럼 억압하며 살았기에, 있어도 자유롭고 없어도 자유로운 동생이 고울 리 없지요. 형의 분노에는, 자기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마음껏 저질러도 심판받지 않는 동생에 대한 부러움도 뒤섞여 있는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아들의 방향성이 아버지를 떠나기도 하고 향하기도 하고 또 고집스레 버티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방향성은 오로지 아들을 향한다는 걸 봅니다.


유산을 요구할 때도, 작은 아들이 돌아올 때도, 큰 아들이 어깃장 부리며 버틸 때도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그런 주님의 속성을 너무 잘 알기에 당신 생기신 모습 그대로 우리를 좀 봐달라고 졸라댑니다.

"보살펴 주십시오"(미카 7,14).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미카 7,15).
"저희 죄악을 ... 던져 주십시오"(미카 7,19).
"성실히 대하시고 ...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미카 7,20).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이 이렇게 졸라대는 예언자가 귀찮으실까요? 절대 그렇지 않지요! 오히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해 간청하는 자녀를 향해 몸을 돌리고 허리를 굽히고 팔을 벌리고 머리를 숙여 그가 바라는 바를 해주지 않을 수 없으실 겁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니까요.

스스로 아버지 곁에 있다고 여기고, 자신이 율법과 제도 안에 공고히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면, 오히려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곁인 줄 알았지만 영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마음, 다른 생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자주자주 자신을 살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시는 아버지를 정향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사순절이 참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