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앎"을 향합니다.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요한 7,10).
일찍이 형제들이 예수님께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한 7,4) 하고 종용한 바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홀로 조용히 올라가십니다. 형제들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임을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예루살렘 주민들이 설왕설래 합니다. 예수님 인격이나 하시는 일로 보아 진짜 메시아실 것도 같지만, 그분의 출신 성분이 걸립니다.
어느 지역 출신, 어느 지파 누구의 아들, 직업과 배움과 재산 등등 어느 것 하나 영광의 '메시아'스러운 점이 없어 보이니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합니다. 이러저러한 사회적 조건이 그 존재의 전부라고 여기는 짧고 경박스런 몰이해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 덕분에 체험하고 놀라고 기뻤던 모든 경이와 신비의 순간은 잊고, 섣부른 "앎"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태도를 곁눈질하며 진정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권력자의 판단에 숟가락을 얹는 것만큼 안전한 앎은 없으니까요.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29).
예수님께서 폭탄 발언을 하십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유다인들이 하느님으로 섬기며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그분을 "너희는 모르고 나는 안다"고 직접적으로 밝히신 것입니다.
보내신 분과 파견된 이는 이처럼 상호적 앎으로 충만하십니다. 서로를 온전히 아십니다. 앎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겁니다. 아버지를 알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아드님의 뜻을 무한히 지지하시며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아드님을 알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 삼위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무지가 끼어들 구석은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의인에게 올가미를 놓는 악인들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 부른다"(지혜 2,13).
악인들이 의인을 못마땅해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그는 알고 자기들은 모른다는 점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생각을 가만히 들어보면 의인에 대해 악인들이 아는 바는 거짓과 열등감과 악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과 열등감과 악의를 지니고서는 어떠한 "앎"에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앎"이란 인간이 불완전하게나마 지니고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상성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지혜 2,12).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지혜 2,19).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지혜 2,20).
악인들의 음흉한 모략은 복음 속 유다인들의 속마음을 복선처럼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동안 그들은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접해 왔지요. 이제 그 악의 칼끝이 예수님을 겨누고 있습니다. 인간의 섣부른 앎은 하느님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제가 좀 아는데요."
살면서 간혹 듣기도 하고 또 말하기도 했던 내용이지요. 사실 안다는 것은 무한대의 층위와 폭과 깊이를 지닙니다.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래서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내포합니다.
하느님은 모두 아십니다. 그분이 완전한 앎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선물이고, 미약하나마 그분을 닮은 구석입니다. 그런 전지하신 하느님이 바로 사랑이시지요.
그러니 사랑하지 않고서는 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그를 안다"는 말 안에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스며있지 않다면 그냥 침묵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내 속으로 낳았어도 도무지 모르겠어", "알다가도 모르겠어" 하는 말이 오히려 진실이고, 스스로의 무지를 아는 지혜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는 앎과 무지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미천한 우리에게 겸손히 당신을 드러내시다가도 이내 얼굴을 감추시고, 우리는 느닷없는 앎에 전율하다가 다시 무지의 어둠으로 곤두박질치며 더 짙고 깊은 갈망으로 허우적댑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목말라하며 이 영적 파도타기 안에서 꿋꿋이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지혜 2,22)을 기다리며 앞으로 나아갑시다.
언젠가 주님께서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으시며 "나는 너를 안단다" 하실 겁니다. 그때 우리도 아는 그분 품으로 거리낌없이 뛰어듭시다. 말씀으로 통교해온 그분과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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