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3월 26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dariaofs 2020. 3. 26. 06:09



오늘 미사의 독서 안에서 우리는 고독하지만 충만한 두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모세와 예수님입니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요한 5,34).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증언해 주는 증인들을 밝히십니다.


일찌기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그분을 증언하며, 그분 말씀과 손에 힘을 주시는 아버지 역시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지요(요한 5,39).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 5,41).

예수님은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물질과 명예에 약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아시기에 사람들의 평판에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예수님에게 등을 돌린다 해도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지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이해와 통찰은 실망이나 미움으로 번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고 진한 연민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날을 세우는 유다인들조차도 미워하시거나 단죄하실 수 없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요한 5,45).

유다인들 입장에서는 몹시 불편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의 권위, 율법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여겨 그분께 신성모독의 혐의까지 씌울 참이었으니까요.

모세는 이스라엘의 희망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갈 율법을 받아 전한 존재이고 주님이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었으니까요(신명 34,10 참조).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와 율법은 하느님과 그들 사이의 대체 불가능한 중개자인 셈이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로 진노하신 하느님과 그 앞에서 다급하고 절절히 애원하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당신 자신을 걸고 ...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탈출 32,13).

모세는 결코 이 백성이 잘했다고 두둔하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정상 참작이나 유예를 간청하지도 않지요. 그저 일찍이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친히 발하셨던 맹세를 기억해 달라고, 그래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합니다.

유다인들이 희망하는 중개자는 이렇듯 하느님과 자기들 사이에 서서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고 율법을 전달하는 존재입니다. 그 이상은 불편하고 그 이하는 못마땅할 터이지요.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5,43).

때가 차자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중개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실행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당신 자신을 바쳐 아버지와 세상의 화해를 이룩하십니다.


그분은 한낱 짐승의 피로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던 희생 제사의 시대를 매듭 지으시고,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로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를 새롭게 세워 주신 겁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영성체송).

새로운 하느님 백성은 율법을 사랑의 이름으로 저마다 마음 속에 새겨넣은 사람들입니다.


율법은 단죄와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 안에서 자비와 사랑의 원천으로 간직되어야 합니다. 모든 믿는 이들의 희망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느님이 벗님을 인정해 주시고 믿어주시니까요. 하느님이 벗님의 증인이십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느님이 벗님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실 테니까요. 벗님은 하느님의 옝광을 드러내시기만 하십시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