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3년 5월 3일 다해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dariaofs 2013. 5. 3. 07:34

 

                                                                                     (요한 14,6-14)

 

 

 

<계시, 체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필립보 사도가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한 말은

하느님을 '구경'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직접 만나고 싶다는 뜻입니다.

충분하겠다는 말은 '더 바랄 것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필립보 사도의 말은 '호기심'이 아니라 '소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앙인이 자기가 믿고 섬기고 사랑하는 주님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고,

항상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 그대들에게 애원하니,

나의 연인을 만나거든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제발 그이에게 말해 주어요(아가 5,8)."

 

이 소망은 어린 아기가 항상 엄마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린 아기는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하고,

함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평화를 얻고 안심하게 됩니다.

"주님, 언제까지 마냥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시렵니까?(시편 13,1)"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은 신앙생활의 종착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묵시 21,3)"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4)."

 

죄인들은 하느님을 피해서 숨으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나서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창세 3,8).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20)."

하느님을 피해서 숨는 것, 또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죄의식을 나타내는(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말로는 '나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더라도,

또 실제로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더라도

죄인들은 무의식이든 잠재의식이든 어딘가에 숨어 있는 죄의식 때문에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 사도의 요청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 14,9)"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것과 하느님을 뵌 것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는 것'에 관한 말씀만은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과 같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과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같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같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요한 14,10-14).

 

이 말씀에 대해서 나중에 토마스 사도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또 요한복음서 저자의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라는 증언과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는 선언도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는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라는 말씀과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라는 말씀에는

'하느님을 직접 보려고 하지 마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보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도 아니고,

'사람은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없다.'도 아니고,

'아직은 아니다.'로 해석됩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직접 뵙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이 말씀은 '나중에' 하느님(예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인데,

함께 살면 당연히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스테파노 순교자 경우에는 순교 직전에 하느님을 보았습니다(사도 7,55).

요한묵시록 저자도 하느님을 보았습니다(묵시 4,2).

그래서 하느님께서 일부러 당신의 모습을 안 보여 주셔서

우리가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준비가 덜 되어 있어서 '아직은'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언젠가는(종말이 되기 전이라도)

스테파노나 요한묵시록 저자처럼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격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능력으로, 또 자기들 마음대로

하느님을 직접 뵙거나 만나거나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않으면서

어떤 특별한 신비 체험이나 사적 계시 같은 것만 쫓아다니는 것은

올바른 신앙 태도가 아닙니다.

현재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의 신앙생활을 먼저 잘해야 합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