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dariaofs 2020. 6. 22. 05:34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일러줍니다.

복음은 계속되는 예수님의 산상 설교 대목입니다. 설교의 대상은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마태 4,25)이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마태 7,5)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그의 허물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려면 나름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자의적 기준일 수도 있고 공동체적 기준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자의적 기준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타인을 자기 취향이나 사고방식, 선호도에 따라 함부로 심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법이나 판례, 관습 등 공동체적 기준에 기대어 자기 판단의 근거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상대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칫 공적 기준을 제 편의에 맞게 재단하고 편집해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제1독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몰락이라는 아픈 역사를 다룹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2열왕 17,7).

성경 저자는 이 비극적 멸망의 원인을 성찰하며 신학적으로 재해석합니다. 즉 하느님 백성의 몰락은 하느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분께 충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등을 돌리고 업신여긴 탓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파란 많은 자기네 역사를 끌어가면서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층은 율법과 계명, 성전을 수호하는 일에 골몰하지요.

문제는 그러한 충성과 열정이 율법의 정신보다 형식에 더 집착하는 율법주의로 고착되어 버린 데서 발생합니다. 율법이 하느님을 더 열렬히 사랑하고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동력으로 발휘되기보다, 하느님께는 적당히 예를 다하면서 사람을 구분하고 단죄하고 심판하는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율법 안에 깃든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도 전에, 그 세세한 기준과 씨름하느라 예민하고 각박해질 뿐이었지요.

"심판하지 마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예수님은 오랜 세월 자기도 모르게 몸과 정신에 새겨진 잣대, 율법주의를 먼저 들어내라고, 그러다 보면 타인을 함부로 심판할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율법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지켜야 하는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그분 말씀을 사랑이라는 잣대로 받아들이길 바라십니다. 사랑으로 품고 사랑으로 발휘되지 않는 말씀은 우리 생각과 속셈을 꿰뚫어 보시는 그분께 모욕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심판도 단죄도 지적도 교정도 멈추는 게 맞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차올라 그가 나인듯 보일 때까지, 그가 예수님인 듯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심판하지 않는 이 앞에서는 주님도 심판을 주저하십니다. 그에게는 이미 심판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오직 하나인 심판이 사랑의 심판이듯 우리의 심판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벗님의 눈이 사랑이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려고 애쓰는 벗님을 칭찬하고 응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