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dariaofs 2020. 7. 21. 09:51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영적인 가족 관계의 핵심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마태 12,46)

지금 현재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군중은 그분 곁에 모여 그 말씀을 듣고 있지요.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과 군중이 통교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가히 하나된 상태라 말할 수 있을 듯하지요.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마태 12,46).

예수님의 육적 혈연적 가족이 뒤늦게 도착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미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누어지는 현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야기하려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지금 예수님 곁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은 "셰마 이스라엘! /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라는 유다교 신앙의 핵심을 지금 여기서 실행하는 이들입니다.

들음이 실행과 무슨 관계냐고요? 들음 안에는 실행이 가능태로 녹아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는 주님의 말씀이 이를 증명하지요. 말씀은 이루어짐을 전제로 합니다. 진정한 들음은 실행을 품고 있기에 실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말씀은 그래야 완성되니까요. 모든 말씀의 들음(lectio divina)은 묵상(meditatio)과 관상(contemplatio)를 넘어 실행(actio)으로 완성된다는 이야기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 백성이 주님께 과거를 상기시키며 자비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예루살렘의 기도" 대목입니다.

"옛날처럼 ... 보살펴 주십시오"(미카 7,14).
"먼 옛날 ... 맹세하신 대로 ...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미카 7,20).

상대방에게 과거의 기억이나 추억을 빌어 도움을 청하는 심정이 어떨지 헤아려 봅니다. 지금 내 처지로는 여러 모로 자격이 모자라 면목도 없고 송구스럽지만 그래도 호의와 도움을 간청해야 하는 순간이 닥치면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자신들의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중입니다. 먼 옛날 조상들에게 하셨던 자애와 보호의 약속이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유효하기를 바라며 호소합니다.

사실 시간이란 인간에게나 과거, 현재, 미래로 규정되지, 시간의 한계에 매이지 않으시는 주님께는 그저 하나의 시간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옛날의 말씀, 그때의 기적이 오늘 이 순간 여기서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 담긴 '가능태'는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주님과 사이에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처음 신앙에 들어설 때, 세례 때, 개별적으로 강렬한 영적 체험을 했을 때, 용서받았을 때, 구원을 체험했을 때 등등 ... 아마 우리의 수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존재하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과거를 현재까지 이어와서 주님 앞에 머무릅니다.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고 더 시간을 내어 사랑에 잠깁니다. 이렇게 형성된 관계는 진행형입니다.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예수님의 혈연적 가족은 현재 "밖에" 있습니다. 그분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누가 당신의 어머니이고 형제인지 밝히신 예수님은 육적인 가족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하느님 말씀 앞에 현존하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참여와 일치의 조건을 이야기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는 기존의 편협한 혈연에 기초하는 인맥주의를 넘어서야만 참으로 시작될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혹 주님과의 사랑을 현재화하는데 미적대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계속 유예하거나, 마음속 지향만으로 만족하거나, 멀찍이서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바라보는 정도로 나는 그 기억을 과거 또는 미래에 묶어두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을 마냥 "왕년에~"나 "언젠가는~"으로 치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랑은 기억을 타고 현재로 넘어와 지금 여기서 생생히 실현되는 동시에 미래의 완성까지 끌어당기는 신비입니다. 지금 주님 앞에서 마음을 열어 말씀을 듣고 머무르는 벗님이 바로 그 사랑을 현재화시켜 실행하는 주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그런 벗님에게서 완성될 하느님 말씀을 기대하고 또 축복합니다. 나의 형제인 벗님, 나의 누이인 벗님, 나의 어머니인 벗님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심을 축하드리며 감사드립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