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8월 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dariaofs 2020. 8. 1. 05:58

8월 첫날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단순 소박한 이들의 힘이 드러납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4,5).

헤로데는 동생의 아내를 취한 일에 대해 비판하는 요한이 못마땅해 없애려 하지만 기회를 잡기 어렵습니다. 요한의 뒤에는 그를 예언자라고 믿는 군중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안하무인의 헤로데라도 군중이 두렵기는 한가 봅니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마태 14,).

하지만 결국 헤로데도 군중 보다 더 무서운 자기애의 올가미에 걸려들지요. 호기롭게 큰소리 친 허세와 체면에 밀려 그는 요한의 목숨을 빼앗습니다.

제1독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보여집니다.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예레 26,11).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예레미야를 고발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내용을 들어보면 좀 이상합니다.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에서 보통 죽어야 할 죄라면 하느님을 거스를 때 발생할 터인데, 그들은 안위를 바라는 자기들 심기를 거슬렀다고 사형을 언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예언자가 대변하는 하느님도 자기들의 안위를 보장하는 예루살렘을 거슬러서 말씀하셔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오만입니다. 하느님의 도성이 하느님의 윗자리를 차지한 꼴이니 주객이 전도된 형국이지요. 예루살렘 도성의 영광에 취해 주인이신 하느님을 잊은 것 같습니다.

"대신들과 온 백성이 사제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예레 26,16).

일반 백성과 관료들이 소위 종교 지도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에게서 예레미야를 구해냅니다. 진실을 알아듣는 그들의 논리가 종교 전문가들의 왜곡된 시각을 정확히 바로잡지요. 예루살렘 도성에 닥칠 비극을 전한 자체가 사형에 준하는 죄목이 될 수 없으니까요.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담아 주신 말씀을, 보내신 곳에 가서 전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반드시 청중이 존재하지요. 하느님의 뜻이 있고, 이를 전하는 예언자가 있으며, 듣고 따르는 백성이 있습니다. 말씀은 이 모두를 관통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십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마태 10,40-42 참조).

 

오늘 독서들이 보여 주듯이 말씀을 경청하고 깨닫는 데에는 지식이나 학위, 신분적 조건 등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닌 듯하지요. 예언자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이라 순히 듣고 자기 삶에 적용하려 노력하는 이는 이미 예언자와 말씀으로 이어져, 하느님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단순하고 소박한 보통 사람이어도 그렇습니다.

오늘의 미사 독서들에 등장하는 영주나 고관대작들, 사제나 예언자들 틈에서 보통의 군중들, 백성들의 힘이 두드러집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단순 소박한 그들의 시선은,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바람이 있지만 욕망의 도를 넘지 않는, 하느님 경외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욕망이 선과 진실을 훼손해 악인 듯 왜곡하고 삼켜 버리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전하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더 귀하고 고마운 때입니다. 비록 대단한 지식이나 큰 힘이 없는 우리지만, 자기애에 사로잡혀 눈과 귀와 마음을 닫아버리지 않는다면, 묵묵히 진실 편에 서는 것만으로도 말씀의 진정성을 증언하는 큰 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영원한 도움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