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위로의 두 양상을 만납니다. 거짓 위로와 진정한 위로입니다. 대체로 거짓 위로는 인간적 욕망에 화답하고, 진정한 위로는 하느님에게서 오지요.
"내가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예레 28,2)
예언자 하난야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며 사제들과 온 백성에게 전합니다. 이미 주님의 집 거룩한 기물들과 백성의 유력자들이 바빌론으로 치욕스럽게 끌려간 뒤의 일입니다. 얼핏 들으면 하난야의 예언은 지금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법한 내용입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가 참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드러나는 것이오."(예레 28,9)
하난야에 맞서 예레미야가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유다에 내리신 바빌론 유배라는 징벌은 아직 채워야 할 시간이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고통 중에 허우적댈 때에는 당장 듣기 좋은 말에 혹할 수 있지만, 일시적으로 귀를 즐겁게 하는 위로는 마약과 같아 결국 더 큰 고통을 끌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누구의 예언이 위로가 될지 보다는, 어떤 말씀이 진정 주님에게서 온 것인지 진위를 가려야 할 때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배웅과 기도를 위해 남으시고,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며 맞바람에 시달려 몹시 고생하는 중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시자 제자들이 유령으로 오인해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미 파도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터에 겁까지 질려 혼이 쏙 빠진 듯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의 위로는 아주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그 옛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하셨던 것처럼 주님의 자기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탈출 3,14 참조). "나다." 하시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건,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용기가 솟을 일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예수님 현존에 힘입어 호기롭게 물 위를 딛고 선 베드로가 몇 걸음 못 걷고 그만 물에 빠집니다. 주님의 오심과 격려로 엄청난 위로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믿음이 받쳐주지 못한 듯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태 14,36)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도움이 필요한 병자들을 예수님께로 불러 모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지면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고 간청하지요. 그리고, 과연, 그대로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위로는 귓가를 맴돌며 기분만 좋게 하다가 금새 사라지는 거짓 위로와는 차원이 달라 열매가 있습니다. 당장 고난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더 힘겨운 멍에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만, 마음은 위로의 진정성을 알아듣고 믿기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위로가 우리의 믿음과 함께 연주될 때 아름답고 진실한 구원의 작품이 탄생하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말처럼, 진정 평화가 이루어질 때 그 위로의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위로가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진정시키고 잠시나마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용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만든 건, 그분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 즉 연민하는 분이시고(마태 14,14), 기도하는 분이시며(마태 14,23),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러한 진정성을 단순하고 소박한 군중도 알아듣지요.
우리는 날마다 죄와 나약함에 넘어지지만, 날마다 주님의 위로에 힘입어 새로 태어납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사람과 사건으로 우리게 다가와 저마다에게 꼭 필요한 위로를 건네시지요. 당장 마음을 다독여 주실 때도 있지만 도전과 직면을 던지기도 하십니다. 거짓 위로와 진정한 위로를 분별하는 기준은 전하는 이의 "연민"과 "기도"와 "희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진정한 위로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두 살기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불안해하고 분노합니다. 분열을 조장하고 차별을 심화하는 말들이 위로의 탈을 쓰고 사방을 헤집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진정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위하고 피조물을 보호하는 위로인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위로는 진정 연민하고 진정 기도하며 진정 희생하는 이를 통해 전해집니다. 우리 또한 연민과 기도와 작은 희생을 통해 그런 주님의 위로의 통로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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