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dariaofs 2020. 8. 17. 06:08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질문을 던집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고 이미 규정하고 있으니, 그의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심판과 보상은 우리 계산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의 합리성이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성조들 시대부터 통용되어온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스라엘인이라면 기본적으로 당연히 준수해야 하는 계명들을 제시하십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이 젊은이는 율법의 눈으로 보아 꽤나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십계명에 대해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잠시의 고민도 없이 즉각 선언할 수 있다는 건, 늘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힘을 쏟던 사람이던가, 아니면 아예 무관심하게 되는 대로 막 살던 사람의 농담이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마태 19,21)

그런데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완전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꺼내십니다. 스스로가 이미 최대한 노력하고 있음을 자신하는 젊은이에게 최종적으로 도달하고픈 고지는 하느님의 완전함임을 예수님이 간파하신 듯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젊은이가 더 분발해야 할 단계는 없어 보입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예수님은 하늘의 보물을 차지할 수 있는 특별한 길을 알려 주십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물이 우상 자리를 꿰어차고 있으니,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어려운 도전이 될 권고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집안의 멸망과 한탄을 자기 삶에 끼어든 사건으로 생생히 보여 줍니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에제 24,21)

주님께서 벌이실 이 비참한 사건은 이미 예언자가 아내를 잃고도 애도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미리 예견됩니다. 성전은 율법, 경신례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고 자랑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무한히 교만했던 그들이 성전을 잃는다는 것은 하느님 현존이 그들을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유다 왕국은 바빌론에 멸망하여 유배를 가게 될 것이고, 유배지에서 그들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도 조상 대대로 지켜온 관습에 따른 애도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 나라와 자기 신을 잃은 백성에게는 이 모든 게 사치일 뿐이니까요. 성전은 무너지고, 율법은 잊혀지고, 경신례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그들을 떠받치던 기둥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스러져버리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 참 중요합니다. 모든 국민이 법을 준수하고 불법을 삼가야 국민의 안녕과 국가의 안전이 유지되듯이, 신앙 생활에서도 계명이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질서를 지켜줍니다. 오늘 복음 속 젊은이가 보여 준 모범처럼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만만 해도 사실 훌륭하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삶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수칙들은 이스라엘이 지켜오다가 잃어버린 성전과 율법과 경신례처럼, 엄밀히 말해 없어도 살 수 있는 비본질에 가깝습니다. 성전이 없다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고, 율법이 없다고 사람 사이의 도리와 양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또 경신례가 없어도 하느님 은총의 기억과 감사가 우리 마음 안에 새겨져 있다면 언제 어디에 있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본질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문제입니다.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처음 젊은이가 던진 질문 속 "무슨 선한 일"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는 이 "선한 일"을 "사랑"이라고 바꿔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마태 19,17)는 예수님의 대답 속의 그 "한 분"이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자 젊은이는 자기 질문에 돌아온 응답이 너무 버거워 슬픔 중에 떠났지만, 괜찮습니다. 비록 그가 지금 최종적 고지에 도달할 수 없긴 하지만, 아마도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해답이 계속 그의 가슴에서 메아리칠 것이고, 언젠가는 그를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아니어도 되고요. 꼭 하늘의 보물을 차지할 수 없어도, 꼭 사랑의 실천까지는 아니어도 그의 책임감과 의무 이행이 사회의 기본을 구성하는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은 구원에 있어 그리 째째하신 분이 아니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나에게는 무엇을 바라시는지 헤아려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원칙과 기본에 성실한 것만으로 족하다고 하시는지, (사실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선한 일"로 한 걸음 더 나아오기를 바라시는지, "사랑" 때문에 전적으로 봉헌하고 헌신하길 원하시는지...

자비롭고 자유로우신 주님의 구원은 한 도식 안에 박제되어 있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을 듯합니다. 조금 더 욕심이 난다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면 되겠지요 나에 대한 주님의 바람과 지금의 나의 방향성이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면서 우리의 순례 여정은 무르익어갈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