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을 통해 "아무것도"와 "어디에서나"의 연관성을 묵상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 9,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구마와 치유의 힘, 복음 선포의 권한을 받은 터입니다.
대개 여행을 떠날 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지요. 식량과 옷, 돈과 보호장구, 약 등 각자의 필요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를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분의 것은 다 내려 놓고 가라고 명하십니다. 당장 숨 쉬고 걷고 선포할 수 있을 만큼의 기본만 지니라고요. '혹시나 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모든 잉여분에 대해서 홀가분해지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주님께 대한 신뢰이고 그분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물질이나 도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보증으로 여기고 기대는 온전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파견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을 훌륭히 수행합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고통스런 질병을 치유해 주지요. 사람들은 말로만 전해 듣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을 그분 제자들을 통해 만나고 누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직접 체험하는 은총이지요.
"어디에서나"
제자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 발길이 닿는 곳이 바로 주님께서 이끄신 곳, 그분께서 가시려는 곳, 이미 주님 마음이 가 계신 곳입니다. 그들이 어디에나 갈 수 있고, 어디에서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인간적인 힘에는 자유롭고 홀가분하고, 신적인 힘에는 든든했을 것이니까요.
자기 소유와 그에 따른 집착에 자유로운 이는 삶에 있어서 "반드시"라는 요구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내 안위, 내 명예, 내 취향, 내 이익, 내 사람 등 움켜쥔 것이 많을수록 그것들을 뒷받침할 요구가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이는 어디에서나 기꺼이 머물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지요.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주어진 모든 것은 주님의 은총이니까요.
제1독서의 잠언 대목에는 하느님 말씀을 대하는 이의 진실된 바람이 나옵니다.
"그분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잠언 30,6)
짧지만 엄청난 무게가 담긴 권고입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합니다. 온갖 지혜를 쌓은 이가 말씀을 해석한다고 해도, 말씀 자체의 의미와 힘을 넘어설 수 없지요. 그분 말씀에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입니다.
말씀에 다가갈 때, 오늘 파견되는 복음 속 제자들처럼 여분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아무것도"만을 지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즉,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섣부른 감성과 현학적 지식, 얕은 성찰은 말씀의 본류에 가닿기 어렵습니다. 말씀 자체가 순수하고 진실되기에 모든 곁가지나 치장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 쉽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잠언 30,8)
잠언 저자의 기도에서 지혜를 배웁니다. 주체할 수 없을 만치의 과도한 부나 생존을 위해 죄악에 기대야 할 정도의 극심한 가난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려는 이에게 장애가 될 수 있으니, 제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을 섬기기에 알맞도록 섭리해 달라는 겸손한 청입니다. 이기주의와 탐욕을 제거한 순수한 바람이 담백하고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이 지향은 자기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이에게 필요한 듯합니다. 영으로든 물질로든 가진 것이 많으면 하느님 말씀에 자꾸 보태고 싶을 테고,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으면 다가오시는 말씀과 제가 하고싶은 말 사이에서 분별을 잃고 헤매다 길을 잃을 우려가 크니까요. 스스로 넉넉하다는 오만 못지 않게 계속 모자란다는 불안도 말씀과의 만남을 방해합니다. 말씀 앞에 선 이가 모든 잉여분을 내려놓고 "아무것도"만 지닌 채 맑고 순수하게 머무를 때, 비로소 말씀께서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유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것도"의 요구는 커다란 부담과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를 물질적 기준으로만 보면 더욱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무것도"를 소유 기준이 아니라, 기꺼이 "어디에서나" 주님을 전할 수 있는 비움과 헌신의 자유로 생각한다면 접근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를 치장하던 온갖 군더더기를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말씀 앞에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복음 선포의 힘은 이 머무름과 만남에서 나옵니다. 외출을 자제하고 머물러야 하는 집이든, 소박하게 나누는 안부 안에서든, 또 온라인 활동 안에서든 "어디에서나" 주님 사랑의 기운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은 말씀께서 친히 하실 것입니다. 아멘.
오상의 성 비오 사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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