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11월 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dariaofs 2020. 11. 12. 05:26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루카 17,20)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으로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그간 간절히 기다려온 메시아 시대의 도래로 알아듣습니다. 외세의 침략과 착취, 가난과 질병과 마귀들림의 고통 속에서, 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는 해방과 자유를 꿈꾸었겠지요.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요. 사실 기득권층과 민중이 하느님 나라에 기대하는 바는 꼭 같지만은 않을 겁니다. 민중은 당장 주린 배를 채워주고 억압에서 구해줄 메시아가,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권한을 보장해 줄 제도와 힘이 더 절실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선명히 눈에 보이게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모두의 바람이 충족된 완성 상태로 눈 앞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어서 차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진행형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17,21)

그들이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 예수님이 오셔서 현존하는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지요.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 행위를 통해 스며들어 번져가는 사랑과 자비의 열매들이 그 증거입니다. 깃발을 휘날리며 칼과 불을 휘두르지 않으셔도 마음을 열어 믿을 준비가 된 이들에게는 "이미" 온 구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노예 문제를 지혜로이 풀어나가는 사도 바오로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형제로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필레 16)

바오로는 필레몬에게서 도망친 종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에게 간곡한 마음을 담아 서신을 보냅니다. 편지를 받게 될 필레몬은 바오로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고, 콜로새 교회에서 평판이 좋은 인사로 추정됩니다.

당시 노망친 노예에 대한 사회의 벌은 엄격했습니다. 그 노예를 바오로가 함부로 숨겨 주거나 이용해도 안되었지요. 바오로는 드러내놓고 노예 제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를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하지요.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필레 17)

사도 바오로의 이 말은 바로 예수님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가장 작은 이를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또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사도는 오네시모스의 생명과 안위를 걱정하며 필레몬의 신앙과 사랑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갚겠습니다."(필레 19)

사도 바오로의 서간을 묵상할수록 사도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어가는 이유는, 그의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매력 때문입니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속량하셨듯이, 범법자가 된 노예의 모든 허물을 대신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내용을 직접 쓰는 사도의 마음에서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따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사도는 그리스도와 철저히 일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해지던 조선 후기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놀라고도 설레게 했던 가르침이 곧 '하느님 앞의 평등과 하느님 자녀로서 형제됨'였을 겁니다. 양반 천민 할것 없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니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기득권층에게는 몹쓸 사교였지만, 당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기쁜 소식이었지요.

사도 바오로는 굳이 노예 제도의 부정적 측면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누리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규정지은 신분을 넘어 모두가 하느님의 한 자녀인 세상이 곧 하느님의 나라이니까요.

필레몬에게 "그대 덕분에 성도들이 마음에 생기를 얻었다"
(필레 7)고 치하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필레 20) 달라고 오네시모스에 대한 부탁을 마무리합니다. 교회를 위한 필레몬의 관대하고 자비로운 처사가 이 문제에서도 발휘되기를 기대하며 일깨우는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취향이나 이익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자유와 해방이 절실한 고통의 현장에 두루두루, 차츰차츰 퍼져나가는 진행형인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고대하는 각 개인이 끊임없이 인내와 나눔, 희생과 자비를 선택하고 결심하고 실행하면서 완성을 향해 가지요.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 25)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 오늘의 복음 대목은 이처럼 수난 예고로 마무리됩니다. 이 덕에 "내가 갚겠습니다." 했던 사도의 비장한 선언이 가능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안고 오셔서 당신 존재를 바쳐 완성해 나가셨습니다.

저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달리는 이들이라면 하느님의 나라가 별 의미 없는 관념에 불과하겠지만, 자신과 타인의 구원을 위해 존재를 던진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놓칠 수 없는 희망이요 위안입니다. 희망으로 확신하는 행복한 미래이고, 영의 눈으로는 이미 세상을 점유하고 있는 생생한 현재이기에 위안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이용 가능한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형제요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며 내어 줄 때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난과 희생이 양분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는 무럭무러 자라는 중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를 고대하는 동시에 지금 여기서 누리며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여러분 마음에 그리스도의 생기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