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dariaofs 2020. 12. 25. 05:50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십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요한 복음서는 '말씀 찬가'로 문을 엽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께서 말씀이시지요. 하느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모든 것은 말씀이신 성자를 통해 생겨났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말씀은 우리 영혼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빛이 생겨라."(창세 1,3) 하신 하느님의 첫 말씀이 심연을 덮은 어둠을 걷어내며 세상 창조를 시작하셨지요. 말씀은 인간 존재 안에 빛으로 스며들어 새 창조를 이루어가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성자께서 어떤 분이신지 밝힙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을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성자는 빛이시고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십니다. 그리고 강력한 말씀으로 만물을 지탱하고 계십니다. 한없이 연약하고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그분의 약함이 곧 창조하시는 힘이라니 놀랍지요. 인간의 권력자는 강함을 무기로 휘두르지만, 하느님의 주권은 약함의 힘으로 행사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빛으로 오신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그분께서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십니다. 말씀의 힘으로 영의 눈이 뜨이면 자신에게서, 이웃에게서, 세상에서 그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눈을 뜬 이상, 영혼이 열린 이상 빛이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빛은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한없이 따사로운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지시다가, 어느날 우리 내면을 파고 들어와 우리를 가득 채우십니다.

제1독서는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본다 ...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이사 52,8-9)

말씀은 위로하고 격려하는 힘이십니다. 특별히 오늘 같은 날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위안이 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와 식민지 압제 상황 속에서 더욱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듯이 말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의학 기술에 자신만만하던 인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혼비백산해서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대축제일에 그나마 온라인 매체 덕분에 미사를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구유에 경배하지도 성체를 영하지도 서로의 손을 잡아주지도 못하니 마음이 몹시 아프고 고통스럽지요.

그동안 여러 이유로 성사생활에서 소외되었던 분들, 신앙생활은 꿈도 못 꾸며 생계를 이어가는 분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차가운 길에서 지내는 분들, 이국에서 값싸게 노동력을 제공하며 존엄성을 잃어가는 분들, 병고에 지친 분들, 차별에 시달리는 분들...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든 이웃들의 굶주림이 더욱 커다란 허기로 몰려와 영혼을 쓰라리게 합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그럼에도 말씀은 주님의 충만함을 이야기합니다. 부족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그분의 충만함은 물질과 소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어떤 결핍의 상황에서도 충만할 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이는 발가벗겨지고 모든 걸 다 빼앗기고 목숨까지 내놓아야 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하느님이 당신을 비우고 또 비워 바닥까지 곤두박질 치시면서 우리에게 건네신 충만함이 곧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 사랑에 사랑을 받아, 죄의 짐에 짓눌리면서도 결핍과 결함투성이인 자신의 실존을 부여잡고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우리 힘으로 당장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한계와 결핍이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는 단초가 된다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충만함을 내내 잃지 않을 겁니다. 공기만 차 있다면 구부러지고 흔들리고 넘어질망정 쪼그라들지 않는 '바람인형'처럼, 우리의 종잇장 같이 가벼운 실존도 그분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될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복되고 기쁜 성탄날, 말씀 묵상이 다소 무거워졌네요. 주님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를 특별한 은총으로 위로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긴 터널을 함께 통과하는 우리가 서로 연민의 사랑과 기도를 나누며 빛으로 가득한 주님의 충만함을 잃지 않게 보듬어 주면 좋겠습니다.

거듭거듭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가난함 안으로 들어오셨으니 함께 기뻐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