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은 탄생하신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 주십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먼 길을 온 이유는 그들을 놀라게 했던 그 별이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유다인들만의 임금으로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현자인 그들이 감지한 것이지요.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마태 2,9)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누워 있는 베들레헴 마굿간까지 충실히 움직이고, 박사들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별을 따라 갑니다. 별은 박사들을 예수님 구유 앞에까지 이끈 뒤 제 역할을 마치고 멈춥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
박사들은 기뻐하며 아기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애초부터 별을 따라서 떠난 길이니, 그 별이 멈춘 곳이 왕궁이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그들의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끈 것은 별이니까요.
유다인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는 분이 이방인들에게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서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반겨 맞이하고 엎드려 경배한 존재들은 마굿간 짐승들과 가난하고 투박한 목자들, 그리고 이방인들입니다.
제1독서는 온 세상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몰려들리라고 예언합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이사 60,3-4)
저마다 예물을 들고 빛을 향하여 몰려드는 무리를 관상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더 이상 작은 나라 이스라엘만의 임금이 아닙니다. 정의와 평화, 자비와 구원을 목말라하는 온 세상이 이 모두를 지니신, 빛이신 분께로 나아옵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일컬어지는 바오로 사도가 모든 민족들에게 열린 구원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줍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6)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주님 공현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하느님과의 계약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온 세상으로 지평이 열립니다. 모든 이가 주님과 관계를 맺어 그분의 자녀가 되고 또 그분의 신부가 됩니다. 이제 구원의 조건은 인종이나 국적, 민족이라는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써 실현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마태 2,6)
말씀을 품은 이에게 온 세상의 보화가 물밀듯 밀려들 것입니다. 주님을 품었으니 모든 것을 품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소유한 이는 주님께 쏟아지는 경배와 흠숭이 그저 흐뭇하고 기쁠 뿐입니다.
주님 공현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도 지속됩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마음의 구유 안에 말씀을 모시고 사는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신분이나 학위, 부나 권력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어도 주님을 모신 영혼 위에 별은 떠오르고, 구원을 고대하는 이들은 이를 감지합니다.
우리를 비추며 사막과 광야를 돌고 돌아 앞서가던 그 별은 저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이나 왕궁이 아니라 초라한 마굿간 같은 우리 존재 위에서 멈춥니다. 누추하고 죄스런 우리 마음속 구유 안에 머물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말씀이신 분, 그분께 감사하며 경배를 드립시다.
사랑하는 벗님! 나 자신이 가난한 목동 처지여도, 의지할 곳 없은 이방인 처지여도, 마굿간 짐승밖에 못 되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을 모신 곳에 별은 빛나고 그 빛은 남녀노소, 민족과 국가, 인종과 문화를 넘어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평화를 건넬 것이니, 그저 말씀에 머물러 고통에 찬 세상을 품읍시다. 세속의 멍에와 탐욕의 짐을 벗어버리고, 영혼을 비추는 말씀의 별을 따라 여기까지 오신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이제 "일어나 비추십시오."(이사 60,1 참조)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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