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1년 1월 9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dariaofs 2021. 1. 9. 01:06

성탄 시기 막바지 즈음에 이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 세례 축일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요한 3,22)

오늘 복음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세례를 베푸는 이는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그는 자신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백성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 주변으로 모여들어 그를 추종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출현에 불안감을 느꼈나 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준 이가 바로 자기들의 스승이니,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이 경쟁심을 부추긴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세례는 예수님께서 직접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준 것인데도 말입니다.
(요한 4,2 참조)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입장을 담백하게 밝힙니다. 그동안 자신이 선포한 가르침과 베푼 세례가 그에게 기득권이 되어서는 안 됨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주님의 선구자일 뿐이니까요. 그가 길을 준비한 분이 드러나신 이상 이제 그는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도 괜찮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요한 3,29)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그분의 신부입니다. 요한은 신랑 곁에서 기쁨을 나누는 친구 역할이지요. 그는 신부를 제 것으로 가로챌 수 없습니다. 신부를 보고 기뻐하는 신랑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 아낌없이 축하를 보내어 혼인잔치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친구의 몫입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러하다."(요한 3,29)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절제와 금욕의 고행으로 다져진 그의 정신도, 다가오신 인류의 신랑, 예수님 앞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만류하지 못합니다. 이 기쁨은 주님을 알아보는 인간이 누리는 영적이고 신비적인 희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이제 그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드러나시고 요한은 물러서야 할 때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진정한 말씀의 등장으로 아스라히 묻혀갈 것입니다. 소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요한의 담담한 저물어감, 겸손한 퇴장이 참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세례를 받은 우리의 신원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1요한 5,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남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는 죄에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지요.

원죄의 상처와 본성적 나약함, 불완전함은 언제라도 죄에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세례받은 우리는 그때의 순백색 영혼을 회복하기 위해 언제라도 하느님 자비 안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1요한 5,20)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실 겁니다. 죄 없으신 그분에게 세례는 필요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은 죄인인 모든 인류를 대신해 피조물인 강물에 자신을 담그십니다. 주님 세례의 순간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세대를 포함한 온 인류가 그분 안에 있습니다. 이로써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길로 들어서십니다. 그리고 성탄 시기는 막을 내리지요.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 물로 씻김을 받으셨고, 우리도 그 물로 깨끗해졌습니다. 번잡스럽고 혹독한 삶이 때때로 우리에게 죄의 상흔을 남기지만 우리는 지치지 않고 세례 때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려 주님께 달려갑니다. 우리는 이 세례의 은총을 소중히 간직한 채 일상으로 달려갑니다. 이것이 주님 세례 축일 이후 이어지는 연중 시기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난 성탄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너나할것 없이 코로나19의 위협과 어려워진 경제사정, 이기심과 분열로 혼돈의 때를 지나온 것은 맞습니다만, 절박한 가운데 각자의 영혼 안에 임하신 주님과의 내밀한 동행은 더 각별하지 않았을까 기대해 봅니다. 오늘과 내일, 말씀 안에 머물러 성탄 시기를 잘 마무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성탄의 은총은 여전히 진행형이랍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