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1년 2월 18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dariaofs 2021. 2. 18. 06:24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이의 행복을 들려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삶에 들어선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가장 처참한 형벌 가운데 하나였으니 그 도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단순히 정치적 메시아의 성공과 영광을 꿈꾸며 부르심에 응답했던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 겁니다.

"많은 고난, 배척, 죽임"(루카 9,22)

게다가 예수님이 "반드시" 일어나리라 예고하신 일들은 그들 출세 욕구의 허를 찌릅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나타났다 스러진 참 예언자들의 운명이 스승에게도, 그리고 언젠가 자신들에게도 예외없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겠지요.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은 사실 우리 마음 저 밑바닥에도 숨어 있습니다. 지금 각자가 지고 가는 저마다의 고통의 십자가도 만만치 않은데, 혹 더 무거워질까, 다른 무엇이 더 얹어질까 지레 겁이 날 수도 있지요. 또 "날마다"라니 그럼 이 지긋지긋한 십자가는 영영 떼어낼 수 없는 천형이란 말인가 절망도 되고요.

십자가와 죽음의 고통을 아시는 예수님도 겟세마니에서 치열하게 투쟁을 하셨지요. 그러니 약하고 부족한 우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와 친한 정도가 영적 성숙의 척도일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는 모세를 통해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30,20)

"십자가"라고 하면 더럭 겁부터 나지만, 사실 우리가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차근히 걸어야 하는 구체적인 지침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지요. 이는 사실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고, 그것도 매우 달콤한 자격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뜨겁고 열렬히 사랑해 다가오시는데, 외려 우리 쪽에서 피하고 거리를 두며 그분을 박제처럼 대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타이틀은 유지하지만, 신앙이 생기면 이기심과 탐욕, 사치와 허영을 추구하던 삶이 불편해질까봐 그분이 자기 삶에 개입하는 것은 애초에 차단하려 합니다. "나는 나대로 살 테니 주님은 그냥 거기 계시라"고, "교회가 정한 의무는 이행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하니 자기는 이 정도만 하겠다"고 경계하는 모습이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이 가장 먼저,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해야 할 바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의무 이행과 교리 지식만으로 그리스도교는 영혼 없는 허식이고 삶의 악세사리나 지적 놀음 수준에 그칠 뿐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끊어내는 결단입니다.

"그분 말씀을 들으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말씀 안에 녹아 계십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결정체시지요.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을 듣고 작은 것 하나라도 실행하려는 노력에서 십자가를 질 힘이 솟아납니다. 말씀을 경청하고 머무르는 이에게 십자가는 매일의 선물이지요. 도전과 보람을 함께 품은 선물입니다.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십자가는 온전한 의탁을 요구합니다. 세속 안에서 스스로 많은 걸 성취했다고 여기는 이들은 하느님께 뭘 받았다고 여기기보다, 자신이 많은 걸 해드린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인생에 느닷없이 닥칠지도 모르는 불행의 파수꾼 정도로 세워놓고 나름의 대가를 지불하는 기복신앙이겠지요.

그분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며, 그분과 함께일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아는 지혜로운 이는 잘났건 못났건, 부자건 가난하건, 배웠건 못 배웠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매달립니다. 무얼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 자체로 그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십자가는 문득 이 질서를 점검하게 만들어 주는 알람(alarm)의 역할도 해 줍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를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화답송)

맑은 물이 풍부한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관상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생명이 넘치는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의탁하는 영혼의 싱싱함과 푸르름이 느껴집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들어선 우리에게 십자가는, 겉으로는 우리를 아프고 우울하게 만드는 형틀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치열하게 뒤엉키며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사람을 더 사랑하라고 재촉하는 선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마다 다른 우리에게 저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맞춤형 선물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하신 십자가가 무엇인지 곰곰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대단히 훌륭한 경지는 못되어도 그럭저럭 비틀거리면서도 십자가를 내팽개치지 않고 여전히 지고 가는 자신의 어깨를 다독다독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격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짐으로써 생명의 나무를 품은, 영혼이 푸르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며 크게 십자가를 그어 강복합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위아래)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가로) 관계회복을 통한 승리랍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