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1년 3월 18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dariaofs 2021. 3. 18. 06:56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의 영광을 추구하는 지 물으십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요한 5,32)
율법에서는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유효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시라는 증언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증언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그분을 증언합니다. 또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였고 "성경" 또한 그분을 증언하니까요.

이처럼 차고 넘치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믿기를 주저하고 또 거부합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자기 속셈과 이익을 섞지 않기 때문이지요. 반면 자기 영광을 좇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과 낮춤과 비움과 작음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영광이 그에게 방해가 될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에 노여워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탈출 32,7)
이 말씀 안에는 주님의 분노와 실망이 가득합니다. 거기에 더해 냉소까지 느껴질 정도지요. 어느새 이스라엘은 '주님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주님의 백성'이 아니라 모세가 데리고 올라온 모세의 백성으로 둔갑해 버립니다. 그만큼 백성의 일탈이 주님게 마음 아프셨음을 알겠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주님 앞에 머물렀던 사십 일을 백성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 금송아지가 나온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실 때 일으키신 재앙들이나 갈대 바다의 기적 같은 놀라운 일들을 이내 잊은 듯합니다. 구원 사건의 증언이 두셋의 증인을 넘어 세상을 가득 채울 만큼 무수하고 게다가 여전히 생생한데도 말이지요.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자기 영광을 좇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백성들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금붙이로 만든 우상에 경배하였네. 풀을 뜯는 소의 형상과, 그들의 영광을 맞바꾸었네."(화답송)
자기 영광을 좇는 것은 결국 하느님 영광의 자리에 우상을 놓고 제 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를 빛내어 줄 우상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쩌면 이스라엘은, 그리고 우리는 삶의 자락마다 구원 사건과 증언들이 가득함에도, 자기 영광을 좇느라 믿음을 보류 또는 거부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 이왕 신과 관계를 맺는다면 자신이 통제 가능한 신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처럼 내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분이 아니라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신 말입니다. 이를테면 재물이나 권력, 인맥 같이 든든하고 예측 가능한 우상일수록 더 좋겠지요.

"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 5,41)
예수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당신께는 아버지 외에 다른 우상이 필요없다고 잘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실 사람의 인정과 칭찬, 찬사가 주는 영광에 기웃거리는 건 마셔도 마셔도 갈증만 더하는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지요. 거기에는 만족이 없고 중독과 추락이 기다릴 뿐인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깊어가는 사순 시기에, 우리 각자는 누구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인지 숙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구원의 증언은 차고 넘치고, 믿음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혹 얼마간의 방황과 일탈이 있었다 해도 우리가 "주님이" 데리고 올라오신 "주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힘 내어 남은 순례길을 걸어갑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