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3년 10월 18일 다해 사도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dariaofs 2013. 10. 18. 00:30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인 성 루카(Lucas, 또는 루가)는 에우세비우스(Eusebius)와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에 따르면 안티오키아(Antiochia) 출신의 그리스인 의사였고(골로 4,14),

 

51년경에 있었던 사도 바오로(Paulus)의 제2차 전교여행 때 그를 수행하였으며, 57년까지 필리피(Philippi)에 머물면서 그곳의 공동체를 지도하였고, 바오로의 제3차 전교여행 때에도 수행한 듯 보인다.

 

또한 그는 바오로가 수감 중이던 61-63년까지 로마(Roma)에 있었으며, 재차 투옥되었을 때에도 함께 있었다. 66년 바오로의 서거 때부터 그는 그리스로 건너간 듯 보인다.

믿을만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에 계시던 마리아를 뵈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마리아의 초상화를 여러 개 만들어 섬겼다고 한다.

 

그가 언제 어디서 복음서를 기술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70-90년 사이에 그리스에서 기록한 듯 하며, 사도행전은 35년부터 63년까지의 교회 성장기를 서술한 것이다. 그는 84세의 일기로 보에시아에서 운명한 듯하지만 순교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며 문장은 소이다.

 

 

강론  (루카 10,1-9)

 

<기쁜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그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점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또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을 때,

제자들이 나자렛으로 다시 갔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을까?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그 '가난한 목수의 아들'의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즈카르야'도 '기쁜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14)." 라고 말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했는데,

그 말을 들은 즈카르야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즈카르야는 기뻐하지 않고, 시큰둥한 반응만 보입니다.

 

천사가 한 말은 아기를 낳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기를 주실 것이라는 예고였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자기 아내 엘리사벳과 자기가

아기를 낳아야 하는 것으로 알아들었고,

엘리사벳과 자기가 모두 나이가 많기 때문에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즈카르야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은 당연히 그에게도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기쁜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일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은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기뻐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들을 쫓아내셨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은 마귀들이 쫓겨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했고,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루카 8,37).

그들이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고, 예수님의 권능의 성격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힘을 마귀들보다는 센 다른 힘으로만 생각했고,

그 힘을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가서 복음을 선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열두 제자도 마귀를 쫓아내는 활동을 했고(마르 6,13),

일흔두 제자도 마귀를 쫓아내는 활동을 했습니다(루카 10,17).

아마도 게라사인들은 제자들에게도 떠나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그런 상황을 예견하셨습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6)."

이 말씀은, 제자들이 빌어주는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제자들 책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루카 10,10)."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고을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도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인데,

모든 사람이 다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듣기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흘려듣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것은 복음 탓이 아니라 그 사람들 탓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에 세례를 받을 때에는 안 그랬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무디어지고, 사탄의 유혹에 빠지고,

고난과 시련에 걸려 넘어지고,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서(루카 8,12-14)

기쁜 소식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기쁜 소식을 처음 들을 때에는 기뻐하겠지만,

매일 똑같은 소식을 듣는다면 처음처럼 기뻐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은 '기쁜 소식'의 '소식'이라는 말을

세속에서 사용하는 '새로운 뉴스' 라는 뜻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기쁜 소식'의 '소식'이라는 말은

한 번 들으면 낡은 소식이 되는 그런 뉴스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날마다 새겨들어야 할 생명의 말씀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어제 듣고 기뻐했더라도 오늘 들으면 더욱 기뻐지고

더욱 힘이 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