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3년 12월 27일 가해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dariaofs 2013. 12. 27. 00:30

 

 

 

 

성 요한(Joannes)은 갈릴래아의 어부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야고보(Jacobus, 7월 25일)의 동생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겐네사렛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삯군들과 배를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가 5,10-11). 이들 형제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또 흥분을 잘 하였기 때문에(마르 10,35-41), 예수님은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마르 3,17).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 예를 들어 예수님이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을 때(마르 5,37; 루가 8,51),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마태 17,1; 마르 9,2; 루가 9,28), 게세마니(Gethsemane) 동산의 기도(마태 26,37; 마르 14,33)와 같은 극히 중요한 시기에 베드로(Petrus)와 함께 예수님 곁에 있었다.

 

또 성서 여기저기에는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라는 인상을 주며, 최후의 만찬 때에 스승의 가슴에 기댔던 사람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셨다(요한 19,25-27). 뿐만 아니라 부활 아침에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갔고(요한 20,1-5), 그분의 부활을 믿었으며,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요한 21,7).

사도행전에서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활동하며 투옥당하기도 했다. 성 바오로(Paulus)는 야고보와 게파(베드로)와 함께 요한을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다(갈라 2,9). 후일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진리를 증언한 탓으로 파트모스(Patmos)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고(묵시 1,9), 에페수스(Ephesus)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그곳에서 수를 다하고 선종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에 따르면 성 요한은 너무나 연세가 높아서 군중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고, 다만 간단한 말만 하였다고 한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네 번째 복음서와 서간 3개 그리고 묵시록은 성 요한의 저작물이라고 전해져온다. 사도 요한의 문장은 독수리이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서의 서두가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강론   :   (요한 20,2-8)

 

<사랑>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요한 20,2)."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요한만 사랑하시고

다른 제자들은 사랑하시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이 말이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을 좀 더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한만을 편애하셨다는 뜻으로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요한 쪽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느꼈고,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려고 노력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똑같은 사랑을 주어도 받는 쪽에서 자기는 더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랑의 응답을 더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도들의 사랑은 부족했다고 깎아내릴 이유는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을 덜 사랑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두 사도 모두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요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자신이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려고 노력한 것은 그 자신의 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장면에서

특별히 언급되어 있는 제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한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십자가 밑에 서 있었고(요한 19,25),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요한 20,2),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만났고(요한 20,14),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증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요한 20,18).

 

사도 요한은 붙잡혀 간 예수님을 따라갔고(요한 18,15),

십자가 밑에 서 있었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고(요한 19,26-27),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요한 20,8).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당시의 상황은

대단히 두렵고 슬프고 긴박하고 답답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한의 사랑은 더욱 특별하게 보입니다.

 

두 사람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요한 15,13)

제대로 실천한 제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죽음 전후의 그들의 행동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글자 그대로 목숨을 내놓은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가서 박해를 받고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과 하나입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에 "나는 예수님만 사랑하겠다." 라고 하면서

이웃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불우이웃 돕기를 생각하지만,

그것만 이웃 사랑인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한 일 가운데 첫 번째는 복음 선포인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이웃 사랑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고,

그 일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궁극적이고) 가장 좋은 것을 주는 일이고,

하느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단순히 자기들에게 맡겨진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에 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지시에 순종했고,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복음 선포 활동에 속한 일이고,

그래서 그 일도 역시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 없이 자기 혼자서만 믿고 자기 혼자서만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엔진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