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1월 28일 가해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dariaofs 2014. 1. 28. 00:30

 

 

 

이탈리아 로마(Rome)와 나폴리(Napoli)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 가족성(城)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퀴노의 백작 란둘프(Landulph)와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불과 다섯 살의 나이로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에는 그의 교육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나폴리 대학교를 다녔으며, 1244년에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카세카 성에 감금시킨 적도 있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고,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Paris)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프랑스 파리와 독일 쾰른(Koln)에서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1월 15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250년과 1551년 사이의 어느 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 토마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없는 황소는 그의 울부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그 후 그는 주로 나폴리(Napoli), 아나니(Anagni), 오르비에토(Orvieto), 로마(Roma) 그리고 비테르보(Viterbo)에서 가르쳤으며, 1259-1264년 사이에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시게르(Siger)와 요한 페캄(John Pecham) 그리고 파리의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리옹(Lyon) 공의회에 참석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토의하라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1월 10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리옹으로 가는 도중 테라치나 교외 포사 누오바(Fossa Nuova)에 있는 시토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 운명하였다.

그는 1323년 7월 21일에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Pius V)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1880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또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이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에서 모든 신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미완성의 대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들여질 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지적 능력 외에도 아퀴나스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무일도를 집필했고,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찬미가도 지었다. 또한 그는 주님의 기도(Pater Noster),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

 

 

강론   :   (마르 3,31-35)

 

<가족, 가정>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어머니와 가족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어머니와 가족을 부정하신 말씀도 아니고,

육적인 가족은 필요 없고 영적인 가족만 중요하다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은

"과연 가족이란 누구일까? 한 번 생각해 보자."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라는 말씀은

"내 어머니처럼"이라는 말을 앞에 덧붙여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내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가족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 가운데 첫 번째 뜻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할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사랑을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르 12,28-34).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이라는 말에는

'이웃은 곧 자기 자신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한 몸입니다(마르 10,8).

따라서 '자기 자신'이 되는 이웃 가운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은

바로 배우자입니다.

 

또 자녀들은 부모의 분신입니다.

(역으로 자녀 쪽에서 보면 부모는 자녀들의 분신입니다.)

결국 부모와 자녀들도 사실상 한 몸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되는 이웃 가운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은

바로 배우자이고, 자녀이고, 부모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가 가장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은

바로 옆에 있는 가족입니다.

 

영적인 가족 운운 하면서 육적인 가족을 무시하는 말은 말장난일 뿐이고,

가정 공동체를 축복하신(창세 1,28)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를 부부로 맺어 주신 일도, 그들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는 일도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가정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공동체입니다.

교구마다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정 사목에 힘을 쏟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라는 계명은

단순히 부모에게만 해당되는 계명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게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라는 계명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자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굶주림을 걱정하고 도와주는 일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자기 가족을 굶기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순서'에 관해서 하는 말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자기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널리 확산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지금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만 실천하고,

그것으로 딱 멈추어 버리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이기심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희생'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반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옛날의 성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족과 가정을 희생시킨 경우도 사랑인가?

(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경우가 있지 않은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희생'은 남에게 시키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입니다.

가족의 경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들이 일방적으로 가족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그 가족들이 성인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정과 가족을 '희생시킨' 분도 아니고 '버리신' 분도 아닙니다.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신 것도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 쪽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함께 하기 위해서

스스로 희생한 것이고, 그 희생은 사랑이었습니다.

 

(가족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성모님께서 전해 들으셨다면...?

성모님은 결코 서운해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아마도 분명히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덕분에 더 많은 가족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