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지금여기 강론대- [신종호 신부] 우리의 부끄럽고 아픈 곳을 드러내게 하소서

dariaofs 2014. 4. 25. 05:00

4월 27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우리나라 연안에서 가장 큰 배라는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그리고 302명의 목숨이 사그라져 가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고 기사를 읽으면서 참담한 마음에 연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날 수 있는 건가요? 어찌 단 한 명의 목숨도 구조할 수 없었던가요? 답답하고 아쉬운 마음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처음 구조하는 인력이 도착했을 때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가요?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아마도 우리 국민 모두가 그렇게 마음이 아플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본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졌는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있을 자리에 있는 것,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바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기본을 지키는 것일진대 우리는 왜 그토록 기본을 지키지 못했던 걸까요?

 

선박 회사도, 그것을 운행하는 승무원들도, 구조하는 사람들도, 총괄하는 담당 기관이나 국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본을 지키는 것은 사람을 중심에 놓기 위해서일 겁니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이것을 우리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손 놓아 버린 건 아닐까요?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습니다. 왜 유다인이 두려웠을까요?

 

제자들의 스승이었던 주님의 허망한 죽음과 부재로 인해서, 그리고 유다인들로부터 당할지 모르는 폭력과 죽음의 공포 때문인가요?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승의 파스카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함에서 기인합니다. 부활을 믿었다면 그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바뀌었을 것이니까요.

 

이렇게 닫힌 공간 속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시어 한가운데에 서십니다. 닫힌 것을 열기 위해서, 제자들 스스로 문을 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를 기원하시면서 오십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까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한다 하여 평화가 주어지던가요? 상대의 마음속에서 평화가 생겨날까요? 주님의 평화는 그냥 무탈한 상태입니까?

 

사실 주님의 평화는 살이 터지고 찢어지는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평화였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손과 옆구리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평화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와 물”(요한 19,34)로써 이룩한 평화입니다.

 

그것은 희생의 평화였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희생과 양보 없이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 말입니다. 그리고 치욕스러울 수도 있으며 제자들의 가슴 속에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처, 우리 내부의 상처, 우리 사회가 우리 안의 치부를 드러내지 못하고서는 절대 이 상처가 치유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얼마나 우리 사회가 사람을 경시하였는지를, 그리고 단지 나의 능력과 돈을 생각하면서 그것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 안에서 얼마나 멸시하고 내쳐 왔는지를 직시해야 합니다.

 

   
▲ <성 토마스의 불신> 세부, 루벤스, 1615년

주님께서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철저하게 우리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숨(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용서를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탁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상처준 이를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주님 성령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자체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한 기쁨과 평화로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무엇인가를 해결하고자 하고 실증적으로 신앙을 바라보고자 하는 토마 사도의 그것이 우리 주변의 반신앙적인 분위기라 하더라도 우리는 용서와 평화의 사도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에게는 의미 없어 보일지언정, 믿는 이들, 나병환자처럼, 예리코의 눈먼 사람처럼, 세관장 자캐오처럼(루카 17,11-19; 18,35-43; 19,1-10 참조)

 

구원에 이르는 길이 신앙의 길임을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주님을 애타게 만났던 그들은 구원을 약속받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그분의 손과 옆구리(십자가), 기쁨, 그리스도의 숨(성령), 죄의 용서, 믿음.

 

오늘 부활 제2주일 요한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들은 사실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의 평화가 없는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형틀에 불과할 것이고 성령 역시 거짓일 따름입니다.

 

평화 없는 용서는, 평화가 없는 믿음은 전부 가짜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가 없다면 그 평화는 허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쁨은 한순간의 쾌락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십자가 없는 성령은 그냥 바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용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 없는 믿음이 진정한 신앙일까요? 그렇다면 기쁨이 없는 그것이라면? 성령이 안 계시는 그것이라면? 용서가 없는 그것이라면? 믿음이 없는 그것이라면?

 

맞습니다. 평화와 십자가, 기쁨과 성령, 용서와 믿음은 전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지금의 십자가와 아픔이 우리 사회에서 평화로 꽃피워지기를, 용서와 치유로 이어지기를,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귀하게 여기며 인간의 구원이 참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임을 밝혀 주시기를 부활하신 주님께 간청합니다.

 

부당한 탐욕과 비겁함 때문에 스러져간 꽃다운 영혼들과 그 많은 희생자들에게 주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이 모든 일들이 하릴없이 시간에 묻히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는 사회가 되도록 부활하신 주님, 저희 모두가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소서.
 

 

신종호 신부 (분도)
대구대교구 옥계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