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8월 8일 가해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dariaofs 2014. 8. 8. 01:30

 

 

펠릭스 데 구즈만(Felix de Guzman)과 아자(Aza)의 복녀 요안나(Joanna)의 아들인 성 도미니코(Dominicus)는 에스파냐 북부 부르고스(Burgos) 지방의 칼라루에가(Calaruega)에서 태어났고, 1184-1194년 사이에는 팔렌시아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아마도 학업을 계속하는 중에 그곳에서 서품된 듯하다.

 

그는 1199년에 오스마(Osma)에서 주교좌성당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었다. 또 그는 1203년에 오스마의 복자 디에고 데 아제베도(Diego de Azevedo, 2월 6일) 주교를 수행하여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로 가서 알비파 이단을 상대로 설교하였고, 시토회의 개혁을 도왔다. 1206년에 그는 알비파(Albigenses) 지역인 프루이유(Prouille)에서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였고,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강론하였다.

1208년 교황대사 베드로 카스텔란이 알비파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는 그들을 상대할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대장으로 몽포르의 시몬 4세(Simon IV de Montfort) 백작을 임명하였다. 이때의 전투는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성 도미니코는 이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단자들에게 설교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214년 시몬 4세가 그에게 카세네일의 성을 주었는데, 이때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하여 활동할 수도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 수도회는 그 다음 해에 툴루즈(Toulouse)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1215년 제4차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에서 자신의 설교자회가 승인받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음 해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로부터 승인을 받고 도미니코 수도회 일명 설교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 성 도미니코는 수도회의 조직을 위해 여생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고 프랑스 등지를 다니며 순회 설교를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회원이 새로 입회하면서 수도회도 정착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들의 요구를 잘 조화시켜 회개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220년에 볼로냐(Bologna)에서 수도회의 첫 번째 총회를 소집하였고, 그 이듬해 8월 6일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헝가리 순회 선교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일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천문학자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마태 16,24-28)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4-26)"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지상의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허무한 것들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고"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세속적이고 허무한 것들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얻을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표현만 보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허무한 일이 될 뿐이다."인데,

진짜 뜻은 "허무한 세상의 것들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힘써라."입니다.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온 세상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는

"영원한 생명 외에는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생애는 하늘나라를 향해서 올라가는 사다리 같은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조금 더 힘들 수도 있고, 덜 힘들 수도 있고,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갈 수도 있고, 조금 더 늦게 갈 수도 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행실'은 그것을 받기 위한 우리 쪽의 노력입니다.

이것은 얻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공짜인데,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려면

빗물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려면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데,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안 보고 자기 자신만 본다면 예수님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보고 자기를 본다는 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고, 편하고 쉬운 길만 찾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태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님만 바라보기 위한 모든 노력을 뜻하고,

세속의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한 모든 노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과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은 반대쪽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꼭 고통과 시련으로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집착을 버리려고 노력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고,

많은 경우에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속담처럼 많은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노력하는데,

신앙의 관점에서는 그것도 집착입니다.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8)."

 

이름이란 남기려고 노력해서 남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다보면 저절로 남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분의 시성식을 거행하면서

그분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는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름이 없는 분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에 대한 시성식도 못하고, 성인으로 선포하지도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을 기억하실 것이고,

하늘나라에서는 다른 성인들과 똑같이 성인이 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몰라서 그렇지 그분들도 똑같은 순교 성인들입니다.)

 

교회에서 그분들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성인으로 선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분들이 서운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