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 여행을 하며 그분들의 삶을 생각했던 그 순간을....... 20090514-15
세종대왕 (1397년~1450년)
조선 4대 임금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하니 재위 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자 위대한 성군으로 정치. 경제.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훌륭한 업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이룩하였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였으며,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팔도지리지, 의방유취 등 법률. 역사, 유교. 문학. 어학. 천문. 지리 . 의약 농업기술 등에 관한 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국가의 오레와 서민이 사례를 정립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세계에서 유레가 없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체계를 갖춘 훈민정음을 창제(1446년 반포)하였으며,
경자자(1420년), 갑인자(1434),년 병진자(1436년) 등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문화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측우기(세계 최초의 우량계), 혼천의(천문관측기구), 양부일구(해시계), 자격류(물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 제작하였다.
박 연 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고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편경, 편동 등 많아느아악기들을 제조하게 하였다.
연분9등법, 전분6등법 등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세금을 공평하게 하였으며, 노비에 대한 사형을 금하도록 하였다.
또한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6진과 4군을 설치하여 국토를 확장하는 한편 일본 대마도를 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영릉>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1446년(세종 28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현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1450년 세종대왕이 승하하여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이로써 영릉은 조선왕를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무덤을 하고 있으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레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후로 왕릉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반대의견이 있어 실행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원년)에 이곳 여주로 옮겼다.
당시 여주에 새로운 능을 조성하기 위해 부역군 5천명과 공장 1백 50명이 20일 동안 일했고, 식량으로 쌀 1천 3백 23석 5두, 소금 41석 3두가 쓰였다고 한다.
영릉은 능 뒤의 칭성산이 주산을, 앞쪽의 북성산이 안산을 이루는데, 주위의 산들이 마치 영릉을 중심으로 꽃봉오리를 에워싼 듯 하다 하여 모란반개형의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여주는 당시 '여흥부'였는데 영릉이 천장되면서 '여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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