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 경

청령포 / 장릉

dariaofs 2010. 10. 22. 05:16

청령포와 장릉을 돌면서 단종대왕의 그 생애를 보고 얼마나 마음 아파했던가... 시간은 흐르고 멀리 왔건만 

이제야 그 시간을 정리하는 것은 또 다른 묵상과 여운이 있어서인가....... 20090618

 

단종(端宗)


단종은 1441년 7월23일(세종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이다. 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2월(세종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 5월18일 문종이 승하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1454년 1월22일(단종2년) 14세때, 여량군 송현수의 딸을 왕비(정순왕후는 82세에  승하)로 맞이하였다.

계유정난이후 1455년 6월11일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세에 상왕이 되었으며(재위기간 1452년~1455년), 박팽년,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2년)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1457년 윤6월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 후인 윤6월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금성대군 유가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24일 유시에 17세의 어린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하였다. [
 
청령포 (육지속의 작은섬 명승 제 50호)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16일 명승 제 5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해인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쌓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단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영조2년(1726)에 세운 금표비와 영조39년(1763)에 세운 단묘유지비가 서 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 장릉 이야기 ~


장릉은 조선6대 왕인 단종의 능으로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이 17세 대던 해에 죽임을 당하여 그 주검이 동강에 버려졌으나 호장 염흥도가 그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의 능이 있는 이곳에 암장하였다.

역사상 가장 슬프고도 애환이 많은 단종대왕의 능은 다른 능에 비해 많이 다르다.

한양 백리 안에 모시는 것에ㅐ 관례였지만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며 낮은 구릉에 모셔진 다른 왕릉에 비해 높은 곳에 모셔져있으며

대부분의 왕릉이 봉문, 장자각, 참도홍살문이 일직선 상에 조영되지만

단종릉의 봉분은 신좌을향으로 모셔졌고 정자각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능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할 수 밖에 없다.

27대 임금 중 유일하게 단종릉에만 있는 장판옥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관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노은 곳이며,

영천은 정조 5년(1791) 발팽년의 후손인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왕릉에 제향을 지내던 한식 무렵에는 물이넘치도록 많이 솟아 올랐다는 신령스러운  샘물이다.

엄흥도정려각은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33년(순조33년)에 가필하여 같은 해에 또다시 증축하였는데 1876년(고종 13년)에 고종이 증사하기를 '충의'라 하여 1879년(고종16년)에 비석에 있는 것을 다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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