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12월 9일 나해 대림 제2주간 화요일(성 요한 디타코(후안 디에고)쿠아우틀라토아친)

dariaofs 2014. 12. 9. 04:00

 

성 요한 디다쿠스(Joannes Didacus, 또는 요한 디다코, 후안 디에고)는 1474년 오늘날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Mexico City)의 일부인 쿠아우티틀란에서 태어나 ‘독수리 같이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쿠아틀라토아친(Cuauhtlatoatzin)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아나후악(Anahuac) 계곡에서 비교적 문화적으로 성숙한 치치메카족(Chichimeca)의 일원이었다. 평범한 농부였던 그는 50세경에 초기 멕시코 선교를 나온 작은 형제회 베드로 다 간드(Petrus da Gand) 신부로부터 요한 디다쿠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 날이 갈수록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는 에스파냐가 마야, 아즈텍 문명이 융성하던 멕시코를 정복한 지 꼭 10년 후인 1531년 12월 9일 멕시코시티 근방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 성당의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테페약(Tepeyac) 산을 넘고 있었다.

 

그날따라 이른 새벽 가시덤불밖에 없던 산 정상에 신비한 기운이 감돌았는데 갑자기 찬란한 빛을 내는 구름 속에서 한 귀부인이 나타나 성 요한 디다쿠스를 불렀다. 그때 그 귀부인은 자신이 은총을 가득히 입은 동정녀 마리아임을 밝히면서 그 장소에 성당을 세우라는 메시지를 주교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들은 멕시코의 초대주교인 후안 데 마라가는 그를 믿지 않았다.

성모님께서는 실망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성 요한 디다쿠스에게 다시 발현하시어 내일 주교에게 다시 가서 성당을 반드시 세울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교는 성모님께서 표적을 보여 주신다면 기꺼이 성모님을 위한 성당을 세우겠다고 말하였다. 성 요한 디다쿠스가 이 말을 다시 성모님께 전하자 성모님께서는 징표로써 테페약 산 정상에 올라가서 장미를 주워 주교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때는 12월이라 추웠고 또 돌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산 정상에 가니 과연 장미꽃들이 있었고 이를 틸마(외투 또는 보자기로 쓰이는 겉옷, 망토)에 담아 주교에게 내보였다. 그 순간 주교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겨울이라 장미꽃이 필 계절도 아니었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성 요한 디다쿠스의 틸마에 새겨진 그림 때문이었다. 바로 그 귀부인의 모습과 그 옷자락을 한 천사가 받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귀부인은 스스로를 ‘과달루페(Guadalupe)의 평생 동정 마리아’로 불리기를 원하셨고 그 성화는 테페약 산 정상에 세워진 성당에 모셔졌다.

그 후 성 요한 디다쿠스는 주교의 허락을 받고 성당 옆 작은 오두막집에 살면서 과달루페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성화를 보여주면서 성모님의 발현 과정과 의미를 설명하였다. 마침내 매일 수천 명씩 개종하더니 발현 후 7년 만에 우상 숭배와 인신 제사에 빠져 있던 멕시코인 800만 명이 거의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의 활동만으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1709년 4월 27일 테페약 언덕에 과달루페 성모님을 위한 두 번째 큰 성당을 다시 설립하여 축성식을 갖고 과달루페 성모님을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포하자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이 자취를 감추는 기적도 일어났다.

 

그 후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인들의 신앙 속에 깊이 자리하였고, 국가의 중요한 시기마다 당신 백성들을 돌보아 주었다고 신자들은 깊이 믿고 있다.

성 요한 디다쿠스는 성모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로 인정받기보다는 내적인 정화를 통해 하느님을 위한 기도와 가치가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는 1548년 5월 30일 생을 마감하면서 과달루페 성모님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1990년 4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그해 5월 6일 멕시코시티에서 시복 승인 기념식이 열렸다. 이어서 그는 2002년 7월 31일 멕시코 과달루페의 동정 마리아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강론   :    (마태 18,12-14)

 

<바로 내가>

 

12월 9일의 복음 말씀은 '되찾은 양의 비유'(마태 18,12-14)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읽고 묵상할 때,

우리는 목자가 찾아 나서는 '길 잃은 양'을

'그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목자가 찾는 '잃은 양'은 바로 '나'입니다.

 

사실 '잃은 양'은 '모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주제로 강론을 하는 사제는

자신도 '잃은 양'에 포함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또는 오셨을 때,

인류는 전체가 다 '잃은 양'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만 제외하고.)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일부는 '되찾은 양'이 되었고,

나머지는 아직도 '잃은 양'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은 원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흔아홉 마리 양을 언급하신 것은

'잃은 양'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실제 상황을 나타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 번 '되찾은 양'이 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또다시 '길을 잃은 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지막 심판 때에 "너는 되찾은 양이다." 라는

확정적인 선언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잃은 양'에서 '되찾은 양'으로 바뀌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되찾은 양'이 된 다음에도

다시는 '잃은 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잃었든지 되찾았든지 간에 '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길을 잃었지만 그래도 목자를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 목자와 함께 있고, 계속 함께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참으로 '되찾은 양'이 된 사람입니다.

 

3. 자기가 '양'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4. "나는 길을 잃지 않았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5. 자기는 혼자서도 길을 잘 찾아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목자가 필요 없다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6.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목자에게로 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또는 노력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7. 몸은 목자와 함께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잃은 양'과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8. 자기도 길을 모르면서 자신의 상태는 반성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길 잃은 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남들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위선자들입니다.

 

9.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목자와 함께, 또 이웃과 함께 사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갖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선교활동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즉 '되찾은 양'이 되기 위해서 선교활동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은

"나 자신이 '잃은 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 즉 선교활동은 '잃은 양'을 되찾기 위한 일인데,

사도 자신이 '잃은 양'이 되지 않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에는 '잃은 양'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되찾은 양'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되찾은 양'이 되었다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았고,

'되찾은 양'으로서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자신이 또다시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도 자신이 그렇게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되찾은 양의 비유'는

'잃은 양'이 되지 말라는, 또는 목자에게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호소'입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요한 15,4.공동번역)."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씀하셨지만(마태 18,13),

우리 입장에서는 반대로,

'한 마리 양'을 잃었을 때의 예수님의 '슬픔'을 묵상해야 합니다.

"양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아흔 아흡 마리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 때문에 목자는 몹시 슬퍼한다."

 

지금 우리는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슬픔'을 드리고 있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