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서의 풍습 >
1) 장자권(長子權)
“야곱이 형에게 상속권(장자권)을 팔라고 제안하자...
에사오는 장자의 상속권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다“ (창세 25,31.33).
장자 권이란 맏아들에게 주어지는 권리를 말한다. 맏아들은 형제들 중의 우두머리로서 가정 내에서 대단한 권위를 지녔으며, 혈통과 가문을 잇고, 아버지의 공적 권리를 계승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특별한 권리가 있었으며(창세 27,30-36). 특히 상속에 있어서는 다른 아들들이 받을 몫의 두 배를 차지할 수 있었다(신명 21,17; 2열왕 2,9).
장자 권은 첩에게서 얻었던, 본처에게서 얻었건, 사랑 받건, 미움 받건 첫 아들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졌다. 아버지 임의로 맏아들이 아닌 다른 아들에게 줄 수 없도록 맏아들의 장자권은 법으로 보호되었다(신명 21,15-17). 그러나 맏아들이 큰 허물을 범했을 때에는 박탈할 수 있었고(창세 49, 3-4), 맏아들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도 있었다(창세 25,31-34).
2) 아기의 이름을 지음
“한나는 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야훼께 빌어서 얻은 아기’라고 하여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다”(1사무 1,20).
이름은 다른 사람과 구별해 주는 호칭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본성을 표현한다는 믿음이 있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대개 아기의 이름에는 아기를 얻기까지의 하느님께 대한 감사나 아기에 대한 부모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 이런 이름들에게는 주로 사무엘(하느님께 구하다)이나 엘리야(나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처럼 신(神)을 의미하는 엘(EL)이나 야훼를 의미하는 ‘야(Yah)’, ‘요(Jo)', '예호(Jeho)'등이 들어 있다.
이밖에도 에사오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난 야곱(발꿈치를 잡은 자-창세 25,26)이나 라헬이 숨을 거두며 낳은 벤오니(가엾은 자식, 내 슬픔의 아들. 창세 35,18)처럼 아기의 탄생 상황이나 환경, 아이의 성격 등을 나타내는 이름도 많다. 또한 라헬(양), 요나(비둘기), 다말(종려나무)과 같이 동식물의 이름을 따오기도 했으며, 유배기 이후에는 먼저 사용한 이름이나 조부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어머니가 이름을 짓는 예가 많았으며(창세 4,25; 29,32-35; 30,6.8.11.13.18.20-21 24.; 35,18; 38,4-5; 판관 13,24; 1사무 1,20; 1역대 4,9; 7,16), 아기 이름을 짓는 날이 규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보통 출산과 동시에, 혹은 출산 바로 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신약 시대에는 낳은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베풀면서 아름을 지었던 것 같다(루가 1,59; 2,21).
3) 아기를 무릎에 받다
“저에게 몸종 빌하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방에 드셔요. 빌하가 혹시 아기를 낳아 제 무릎에 안겨줄지 압니까?”(창세 30,3)
요셉은 증손자들을 무릎에 받아 아들로 삼았다(창세 50,23). 또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라헬은 자기의 몸종 빌하를 통해 얻은 단과 납달리를 무릎으로 받아 자기의 자녀로 삼았다(창세 30,1-8). 이처럼 태어난 아기를 무릎에 받는 행위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합법적으로 받아들임을 뜻한다(욥기 3,12). 대개는 아버지가 아이를 받았으나, 자손이 많은 것을 큰 축복으로 여겼던 유대인들은 손자나 몸종을 통해 얻은 아이까지도 제 무릎으로 받아 아들 항렬에 올렸다.
4) 아기에게서 젖을 떼는 날
“아기가 자라나 젖을 뗄 때가 되었다. 이시악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창세 21,8).
고대에는 이유(離乳) 시기가 오늘날보다 훨씬 늦었다. 대게 아기가 태어난 지 3년만에 젖을 떼었던 것으로 보인다(2마카 7,27). 젖을 뗄 때는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창세 21,8), 이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당시 사회에서 아기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건강하게 자라났음을 기뻐하고 축복하는 잔치이다. 우리 나라에서 백일이나 돌 때 건강하게 자라난 아기를 축복하는 잔치를 벌이는 것과 비슷하다. 힌두인들의 경우에는 아직도 이유식 때 가족들이 모여, 처음으로 아이에게 밥을 주며 축제와 함께 종교적인 예식을 행한다.
5) 아기 출생에 얽힌 관습
-할례와 속량-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아기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그들은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갔다. 그것은 ‘모태를 열고 나온 맏아들은 모두 거룩하여 주님의 차지라 불리리라’고 주님 법에 기록된 바를 따른 것이다“(루가 2,21-23).
할례란 남자의 음경 끝의 피부를 잘라내는 것을 말하는데, 위생상의 이유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행해진 풍습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에서는 아기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가 베풀어졌는데(창세 17,9-14; 21,4; 레위 12,3; 루가 2,21), 이 할례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징표로 여겨졌으며, 아기도 할례를 받음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를 지녔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맏물(중 수컷)을 하느님의 소유로 여겨 하느님께 봉헌했다.
특별히 사람의 경우에는 태어난 지 한 달이 넘기 전에 하느님께 봉헌하고, 부모가 아기를 키우겠다는 뜻으로 은 5세겔을 바쳐 사들여야 했다(출애 13,2 12-13; 34,20; 민수 18,15-16; 루가 2,22-23). 이러한 속량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예식일 뿐 아니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고자 이집트의 모든 맏배를 치신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기념하는 예식이기도 하다(출애 13,15; 민수 3,13).
6) 집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이 말을 너희의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 두어라. … 또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그리하여야 야훼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땅 위에 펼쳐진 하늘이 오래 가듯, 오래 지속될 것이다”(신명 11,18-21).
유대인 가정의 문에는 작은 함(mezuzah)이 설치되어 있다. 이 함에는 양피지가 둘둘 말려져 들어 있는데, 이 양피지 앞면에는 신명 6,4-9; 11,13-21의 말씀이 뒷면에는 ‘샤따이’(‘전능’의 뜻, ‘이스라엘 가문의 수호자’의 히브리어 첫 글자들을 합치면 ‘샤따이’가 된다)가 기록되어 있으며, 구멍 사이로 이 글자가 보이도록 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집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 오른쪽 문설주에 부착되어 있는 이 함에 오른 손을 얹거나 손가락으로 만졌다가 그 손가락을 입에 대면서 “떠날 때에도 돌아 올 때에도(야훼께서) 너를 항상 지켜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시편 121,8)라는 말씀을 낭송한다.
이 풍습은 오늘날 점차 쇠퇴하고 있으나 정통파 유대교인 사이에서는 아직도 행해지는 이스라엘의 아주 오래된 풍습으로,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가정과 자신의 중심으로 모시는 행위이다. 이때에 모든 재앙과 악, 죄로부터 보호해 주십사는 염원을 담기도 한다.
7) 손을 씻지 않고서는
“본디 바리사이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웅큼의 물로라도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마르 7,3)
유대인들의 전통음식은 젓가락이나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집어먹는다. 그러기에 음식을 들기 전에 언제나 손을 씻으며, 도중에도 더러워졌다 싶으면 씻는다. 정결법(레위 11,1-15,33)에 따라 그들은 비단 음식을 들 때만이 아니라 부정탔을 때에도 부정한 인간이나 사물에 덧붙여 있는 나쁜 기운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물로 씻는다. 이 용도로만 만들어진 주전자와 대야가 있을 정도로 손을 씻는 풍습은 그들의 생활 안에 확고히 뿌리내렸다.
손 씻는 풍습은 또한 무죄함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살인범이 드러나지 않는 사건일 경우 시체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은 자기 성읍주민들의 무죄함을 드러내기 위해 “손을 씻어야”(신명 2,6) 했다. 빌라도 총독 역시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기 위해, “물을 가져다가 군중 맞은쪽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피에 대해서 책임이 없소.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7,24).
8) 발을 씻겨 주어야
“물을 길어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좀 쉬십시오”(창세 18,4).
팔레스티나의 기후는 건조하다. 비가 와서 흘렀던 개울조차 말라비틀어질 정도이다. 마른땅에서 일어나는 흙먼지 바람이 여기저기서 춤을 춘다. 그런 환경에서 샌들을 신고 생활하다 보니 남다른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손님을 맞을 때 발을 씻을 물부터 내어놓는 일이다. 천막 문 어귀에서 세 나그네를 맞은 아브라함도, 누이 리브가의 혼례 사절을 집으로 모신 라반도 곧바로 “발을 씻을 물”(창세 24,32)을 내어놓는다. 부유한 집에서는 종들을 시켜 손님의 발을 씻겨주기도 한다.
이런 풍습을 바탕으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줌으로써 당신의 삶이 바로 종의 삶임을 일깨워 준다. 더불어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지를 곰곰이 생각하도록 이끈다. “주요 또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었다면 여러분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요한 13,14).
9) 면도한다는 것은
“그가 면도하고 옷을 갈아입고 파라오 앞에 나서자 파라오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창세 41,14-15).
각 나라의 풍습은 서로 다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면도를 들 수 있다. 팔레스티나 및 고대 근동 국가에서는 평상시에 수염을 길렀지만, 이집트에서는 면도한 모습을 선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수염이 덥수룩한 이들은 야만인 아니면 노예나 죄수들로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요셉도 2년간의 감옥생활을 마감하고 파라오 앞에 나설 때 면도를 단정히 한다.
슬픔과 애도의 표현 또한 나라마다 다르다. 상(喪)이나 재난을 당했을 때에 이집트에서는 면도를 하지 않음으로써, 팔레스트나 및 고대 근동 국가에서는 평소에 기르던 수염과 머리를 깎음으로써 그 슬픔을 표현하였다. “모압은 느보산 위에서, 메드바에서 통곡하고 모두들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는다”(이사 15,2).
10) 기대듯 자리잡아
“(회식자리에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의 품에 기대듯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이였다”(요한 13,23).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 예수를 중앙으로 제자들이 양옆으로 엄숙히 앉아 있다. 이 모습에 익숙해 있는 이들에게는 “예수의 품에 기대듯 자리잡고 있는” 제자의 모습이 왠지 멋 적다. 그러나 예수 당시의 회식 풍습은 그리스-로마 식으로 위의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우선 식탁은 ‘-’자형이 아니라 ‘ㄷ’자형으로 배치되었다. 식탁 뒤에는 의자가 아니라 누울 수 있는 평상이 놓여 있어서, 사람들은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음식을 들었다. 따라서 모두가 옆 사람의 품에 기댄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예수의 품에 기대듯 자리잡고 있는” 제자의 모습은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자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1) 발에 입맞추며
“그는 예수 뒤켠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더니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발라드렸다”(루가 7,38).
예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ㄷ’자형 식탁 뒤에 마련된 평상 위에서 비스듬히 기댄 채 식사를 했다. 따라서 시중드는 이들이 음식을 차리거나 향유를 바르기 위해 손님들의 머리와 발 근처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손님들은 주인에게서 발 씻을 물을 제공받으며 머리나 발에 향유를 발라주는 대접을 받곤 하였다.
때로는 손님들의 발에 입을 맞추기도 했는데, 이는 유대 사회보다도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더 일반화된 풍습이었다. 존경과 애정 내지 무언가를 간절히 청하고 싶은 마음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성서 본문에서 여인의 행동 역시 그러한데, 물이 아닌 눈물로 적시고 수건이 아닌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은 점이 특이하고 감동적이다.
12) 음식을 상에서 날라다 주는데
“그들은 요셉 앞에 맏아들로부터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나이 순서를 따라 앉게 되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먹는 음식을 요셉의 상에서 날라다 주는데,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몫이나 더 주었다”(창세 43,33-34).
예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상 위에서 비스듬히 기댄 채 식사를 했던 것과는 달리,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앉아서 음식을 들었다. 모든 음식은 뷔페 식당에서처럼 한 상에 모아져 있었는데, 그 자리에 바로 주인이 앉았다. 주인은 거기서 시중드는 이들을 시켜 서열에 따라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보냈다. 특별히 호의를 표해야 할 사람에게는 더 많은 양을 주거나 맛난 음식을 별도로 보내기도 하였다. 요셉 또한 친동생을 향한 사랑을 듬뿍 담아 베냐민에게 다섯 몫이나 더 주었다.
13) 잔치에 초대할 때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어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잔치 시간이 되자 자기 종을 보내어 ‘이미 준비되었으니 오시오’ 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했습니다“(루가 14,16-17).
예수 시대에는 사람들을 잔치에 오라고 초대하고는 잔치 음식을 다 차리면 한 번 더 초청을 하였다. 이렇듯 두 번에 걸쳐 초청하는 것은 통상 부유층에서 행해졌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얼추 참석하면 연회장의 문은 닫기고 잔치가 시작되었다. 그 후에는 웬만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기름을 사러 간 미련한 다섯 처녀가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루가 13,25)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공식적인 연회석상에는 잔치 주관자가 한 사람 추대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초대받은 손님 중에서, 로마인들은 초대받은 손님이나 하인장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그는 초대손님의 비중에 따라 적절한 자리를 잡아주고(루가 14,10), 술과 음식이 떨어지지 않게 신경 쓰면서(요한 2,9-10) 잔치의 흥을 돋구어주는 일을 맡았다. †
14) 기름을 바르는 것은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어라.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여라”(이사 61,3).
식용이나 등불의 연료로 쓰였던 기름은 성서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생활필수품이다. 성서시대에 기름은 곡식, 포도주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풍요로움과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신명 33,24; 예레 31,12; 요엘 2,19.24). 이 기름에는 기쁨의 뜻이 담겨 있어서 화장할 때나 축제ㆍ경사때에 발랐으며, 잔치에 초대한 손님에게도 발랐다(시편 45,7; 잠언 27,9; 유딧 16,8; 루가 7,46). 또한 제구(祭具)와 건물 등에 기름을 발라 거룩한 것으로 삼기도 했다(창세 28,18; 출애 29,36; 레위 8,10; 민수 7,1; 2사무 1,2)
그러나 금식할 때나 상을 당했을 때에는 바르지 않았다(2사무 12,20; 다니 10,3; 유딧 10,3; 마태 6,17). 왕이나 제사장, 예언자를 뽑아 세울 때에는 기름을 부었는데(1사무 10,1; 16,1.13; 출애 29,7; 레위 8,30; 1열왕 1,39; 이사 61,1), 이는 ‘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느님의 사람’ 으로 세워져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게 된다는 믿음을 나타내는 표징이었다. 이러한 맏음으로 인해 병을 고치는 데에까지 기름이 사용되기도 했다(에제 16,9; 마르 6,13). 오늘날까지 천주교에서는 세례ㆍ견진 ㆍ신품 ㆍ병자성사 때, 제단이나 성구(聖具) 등의 봉헌 예식 때 사용하고 있다.
15) 겉옷을 넘겨주는 것은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야가 그 옆을 지나가면서 자기의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1열왕 19,19).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다른 사람의 외투를 입는 것은 그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의미하며, 접촉을 통해 그의 인품과 능력이 주입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열두 해 동안 앓고 있던 병이 나으리라 믿었던 여인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마르 5,21-34; 마태 9,18-22; 루가 8, 40-48).
페르샤에서는 예언자의 외투에 영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으며, 아시리아의 정화예식 때에는 왕의 외투가 왕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렇듯 예언자나 대사제, 왕의 외투는 그의 인격과 직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다윗도 사울의 외투를 잘라버림으로써 사울을 제압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음을 나타냈던 것으로 보인다(1사무 24,6). 특별히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나 대사제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외투를 넘겨준다는 것은 그를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직분을 넘겨준다는 뜻이었다. 아론의 뒤를 이어 대사제직을 수행한 아론의 아들, 엘르아잘에게 아버지의 겉옷이 넘겨졌고(민수 20,28), 예언자 엘리야도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걸쳐 줌으로써 엘리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1열왕 19,19).
16)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04.2.26 목동홈피. 별밭
“너희들 가운데서 행한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벌써 자루와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했을 것이다”(루가 10,13).
유대인들에게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나라와 자신이 겪는 불행과 허무한 처지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이민족의 침략을 당해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를 빼앗겼을 때, 자신에게 커다란 불행이나 슬픔이 닥쳤을 때, 특히 상을 당했을 때에 머리에 재(또는 먼지)를 뒤집어 썼다(여호 7,6; 에스 4,1; 유딧 4,11.15). 옷을 찢거나 베옷을 걸치고 잿더미 위에서 지내기도 했으며(욥기 2,8; 42,6), 심지어 재를 먹기까지 하였다(시편 102,9).
재는 다 타고남은 찌꺼기로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을 나타냈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데에도 쓰였다. 자신의 잘못과 나약함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느님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의미로 재(또는 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했다(욥기 42,6; 다니 9,3; 마태 11,21; 루가 10,13). 이러한 풍습은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날인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를 바르는 예식으로 천주교에 남아 있다.
이는 사람으로서 지니는 한계를 인정하고, 사람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새롭게 인식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자비를 구하며 참된 회개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는 예절이다.
17) 향을 사용하는 것은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간 첫날 이른 새벽,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마르 16,1-2).
근동지역에서 향료와 향유는 왕에게 바쳐지는 예물이었으며(1열왕 10장; 2역대 9장; 이사 39,2; 60,6; 마태 2,11등), 일반적으로는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나 사랑을 표현할 때, 화장을 통해 매력을 돋우는 데 쓰였고(아가 4,14; 5,13; 에스 2,12; 유딧 10,3; 16,8), 결혼식 때 빠지지 않았다. 또한 무더운 근동지역에서 땀 냄새를 없애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특별히 이스라엘에서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야훼를 기쁘게 해드리기위해 반드시 향을 피워야 했는데(출에 30장; 35장; 레위 23장; 민수 15,1-10.22-26; 29장 등), 이때 사용되는 향은 제사장이나 그의 가족에 의해 특수하게 제작되었고, 일반인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제조할 수 없었다(출애 30,33-38). 보통 향료나 향유는 수입되거나(창세 37,25; 에제 27,22)수액, 나무껍질, 꽃, 뿌리 등에서 얻었는데, 종류는 다양했으며 그중 나르드 향이 가장 좋고 비쌌다(아가 1,12; 4,14; 마르 14,3; 요한 12,3).
향을 낼 때에는 향 가루나 향 기름[향유]을 발랐으며, 향료를 향 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니거나 일정한 장소에 놓아두었다. 또한 잔치의 주인은 손님들에게 향유를 발라 줌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하기도 했는데(마르 14,3-9; 마태 26,6-13; 루가 7,36-50; 요한 12,1-8),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몸에 향료와 향유를 바르거나 무덤에 넣어 두기도 했다(마르 14,3-9; 마태 26,6-13; 루가 7,36-50; 요한 12,1-8; 19,40).
유대인들의 이러한 풍습은, 왕족이 죽었을 때 그 시신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특별한 향유를 사용했던 이집트나 그리스의 풍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8)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은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을 거슬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사도 13,51).
이교도들을 우상숭배자요, 부정한 자들로 여겼던 이스라엘에 이런 규정이 있다. “이방인의 땅에서 향료를 가져올 때 이방인의 먼지를 가져오지 않도록 조심하라. 텐트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순결한 이스라엘 땅을 더럽히지 말라”.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지역에서 돌아올 때 먼지를 털어 버리는 행동을 했는데, 이처럼 일정한 지역을 떠나올 때 발에서 먼지를 터는 행위는 부정(不淨)한 그 지역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표하고, 절교(絶交)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풍습을 잘 알았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역을 떠나갈 때에는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이르셨다(마르 6,11; 마태 10,14; 루가 9,5; 10,11). 사도 바울로 역시 자신을 박해하는 유다인들과 절교를 선언하는 뜻으로 먼지를 털어 버리고,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였다(사도 13,51;참조 사도 18,6). †
19) 손을 얹는 것은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시고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셨다(마르 10,15-16).
성서에서 손울 얹는 행위(안수, 按手)를 자주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축복을 자손들에게 물려 줄 때(창세 48,13-16),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집전 하는 사제 집안인 레위인들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가려내어 정화할 때(민8,10), 어떠한 일을 수행하도록 사람은 뽑아 세울 때(민수 27,23; 신명 34,9),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마르 8,23-25; 루가 4,40)에 손을 얹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과 그분의 권한과 능력을 전달하고, 하느님의 소유로 뽑아 세움을 뜻하는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심으로써(마르 10,16), 어린이들도 하느님의 축복에서 제외되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임을 분명히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손을 얹는 것은 안수하는 자와 받는 자의 일치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특별히 이는 제사 때에 봉헌자를 대신한다는 의미로 제물에 손을 얹은 다음그 제물을 바쳤던 번제나 친교제, 속죄제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레위 1,4; 3,2; 4,4).
20) 얼굴을 기리는 것은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 왔다. 엘리야는 목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1열왕 19,12-13)
일반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창피를 당하거나 죄가 밝혀져 부끄러울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질 때에 행하는 거의 본능적인 행위이다. 또한 대부분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하늘 같이 높고 거룩한 존재로 여겨진 임금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으며, 임금이나 고관이 행차할 때 길가의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러기에 임금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금조차 뽑아 세우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 모든 것 위에 계신 야훼 하느님을 직접 뵙는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이사야는 하느님을 모시는 스랍(세라핌, 천신)조차도 날개로 얼굴을 가리우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으며(이사 6,2), 야훼의 목소리를 들은 엘리야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웠고(1열왕 19,13),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뵙게 된 모세도 두려워 얼굴을 가렸던 것이다(출애 3,6).
심지어 이스라엘 신앙은 야훼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게 되면 죽는다는 믿음까지 있었다(출애 33,20; 판관 13,22). 이렇게 유다인들이 얼굴을 가리는 것은 야훼께 대한 신앙이 담긴 행위로, 야훼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경외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유다인들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기도하기도 한다.
21) 신발을 벗는 것은
“이리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애 3,5).
성서 시대에 이스라엘의 서민들은 대개 맨발로 생활하였으며, 부유한 사람만이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신발도 대부분 샌달이어서 흙먼지로 인해 신발이나 발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보니 더러워진 발을 씻지 않거나, 먼지가 묻은 신발을 신고서는 집에는 물론 성전이나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흙먼지가 많이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지역적 특성 때문에 생겨난 풍습이기도 하지만, 거룩한 장소에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출애 3,5; 여호 5,15)은, 인체에서 가장 불결한 부분으로 여겨진 발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는 것으로서, 인간의 추하고 나약한 면까지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겸손과 존경의 마음을 표하는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왕 앞에 나설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은 맨발이어야 했으며, 이슬람 교도들은 오늘날까지도 양말을 벗은 채 사원에 들어간다. 그리고 성서에서 거룩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맨발로 다닌다는 것은 상을 당했거나, 커다란 고통과 비참을 겪고 있음을 뜻하며(2사무 15,30; 욥기 12,17.19; 이사 20,2-4; 미가 1,8), 신을 벗기우는 것은 매우 치욕적인 일로 제시된다(신명 25,9.10). 반면, 신을 다시 신는다는 것은 그 굴욕과 고통의 시기가 끝났음을 나타내는 표지였던 것으로 보인다(에제 24,17.23).
22) 손을 들어 맹세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야훼께 손을 들어 맹세하오”(창세 14,22).
맹세는 중대한 상황에서 진실을 밝히거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약속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나타내는 행위로, 공동체의 결속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스라엘에서 맹세는 성스러운 행위로 여겨져, 맹세할 때 거룩한 물건을 잡거나(창세 24,2; 47,29), 거룩한 물을 들거나(민수 5,16-24), 신성한 장소에서 공표(호세 4,15 참조)하는 등 상징적인 행위가 따랐으며, 법적인 맹세일수록 제단과 제사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1열왕 8,31-32; 2역대 6,22-23).
특별히 성서에서 손을 드는 것은 맹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몸짓이었는데(창세 14,22; 민수 14,30; 에제 20,5-6.28), 주로 오른손을 하늘로 들어 올려 맹세하였다(신명 32,40; 시편 144,8.11; 묵시 10,5-6). 유다인들에게 오른손은 왼손보다 더 능숙한 손, 칼을 잡는 손으로서 힘의 상징이었다. 야훼께서도 오른손으로 맹세하셨으며(이사 62,8), 당신 백성을 구하실 때에나, 당신 자신을 알리실 때에도 오른손으로 하셨다(출애 15,6.12; 시편 20,6; 21,8).
이렇게 권능과 완전한 힘의 상징인 오른손을 들어 맹세하는 것은 그만큼 맹세에 충실할 것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유다인의 풍습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깊게 받은 여러 나라에서, 취임식 선서 때나 법정에서 증언할 때, 혹은 결혼 서약을 할 때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
23) 발꿈치를 드는 것은
“어차피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거슬러 그 발꿈치를 들었다’고 한 성경 말씀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요한 13,18).
우리는 언제 발꿈치를 들까? 키를 높여 더 멀리 보고자 할 때나 무엇인가를 찾으려 할 때, 출발선에서 한껏 발꿈치를 들고 출발신호를 기다리다 힘껏 달릴 때 발꿈치를 든다. 누군가에게 대들거나 공격할 때에도 발꿈치가 들린다. 뒤로 돌기 위해서도 발꿈치를 들어야 한다. 이와 같이 발꿈치를 드는 때는 다양하지만, 성서에서는 누군가를 저버리거나 배반하는 행위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에서는 병에 걸린 이들은 하느님의 벌을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여겨 사회로부터 격리ㆍ추방되었는데, 건강할 때 흉허물없이 사귀며 어울리던 친구들이 병든 친구에게 발꿈치를 들어 보이는 것은 그 병든 친구를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시편 41,9; 공동번역 시편에서는 ‘뒷발질을 합니다’로 번역되었고, 구약성서 새 번역 시편 41,10에서는 ‘발꿈치를 들어올리나이다’로 번역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유다가 배신하게 될 것을 가리켜, ‘발꿈치를 들었다’는 시편 41,9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요한 13,18). 곧 예수께서는 발꿈치를 드는 행위를 당신을 거슬러 배반하는 행위로 적용하신 것이다.
24) 허리를 동여매는 것은
“여러분은 허리는 동여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같아야 합니다”(루가 12,35-36).
성서에서 허리는 육체적 힘의 근원이자 생식기능의 중심으로 여겨졌다. 또한 열정이나 감정의 중심으로도 여겨졌다. 따라서 ‘허리가 떨리다’(이사 21,3), ‘허리가 휘청거리다’(에제 29,7), ‘허리를 꺾다’(신명 33,11; 집회 35,20), ‘허리가 끊어지다’(나훔 2,11), ‘허리를 가누지 못하다’(시편 69,23; 바룩 2,18) 등의 표현은 힘을 잃고 약화되었음을 뜻한다. 반면에 ‘허리에 띠를 동인다’는 것은 어딘가로 출발하거나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 준비하고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날 저녁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리에 띠를 동이고 식사를 했고(출애12,11), 전장에 나서는 군사들은 허리를 동이고 칼을 찼다(2사무 20,8; 22,40; 시편 18,39; 45,3; 1마카 3,3). 또한 감옥에 있는 베드로를 구해 준 천사는 베드로에게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도록 일렀다(사도 12,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허리를 동여매라”고 하신 것은 늘 그분의 부르심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는 삶,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촉구하신 것이라 하겠다.
25) 몸에 표를 하는 것은
“너는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발칙한 짓을 역겨워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주어라”(에제 9,4).
표를 한다는 것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의 몸에 하는 표도 근원적으로 그 사람을 특별히 구별하고, 그 신원과 정체성을 새기려는 것이다. 이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아주 오래된 관습이다. 로마의 경우 군인에게는 손에, 노예에게는 이마에 표하였고, 오늘날까지도 힌두교도들은 신에게 바쳐졌다는 뜻으로 이마에 표를 하며, 곱틱교도들은 팔목에 십자가를 새김으로써 박해받고 있는 이슬람 사회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할례를 비롯한 다른 표들도 근원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이요, 하느님의 종으로 뽑혀진 존재로서 성별(性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성서에서는 문신을 새기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여겨 금한 것으로 보이나(레위 19,28), 사람의 몸에 표하는 상징적인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 주로 이마에 표하였다(에제 9,4.6; 묵시 7,3.4; 13,26; 14,1; 22,4등). 카인의 생명을 보호하겠다는 약 속의 표(창세 4,15), 곧 닥칠 징벌에서 야훼께 충실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이마에 하도록 한 표(에제 9,4.6;묵시 7,3.4등;참조 출애 12,1-14.21-27)와 같이 하느님께서 특별히 보호하고 구해 주신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신약시대에 바울로는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낙인을 받았기에, 자신의 주인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역설하고(갈라 6,17), 성조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기 이전에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움의 인(印)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로마 4,11).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가톨릭 신자들은 오늘날에도 세례성사 때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 받아 하느님께 특별히 속한 자임을 나타내는 표로, 또한 견진 성사 때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서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는다는 뜻으로 이마에 십자가 인호(印號)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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